열두제자연구. 11 - 작지만 필요한 사람:작은 야고보
들어가는 말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인 유다라고 불리운 사도가 열 둘 가운데 두 사람 있다. 요한은 유다가 다락방에서 예수께 질문한 때를 기록하면서 배신자와 조심스럽게 구별하느라고 "가롯 유다가 아닌 유다가.."(요 14:22)라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마도 유다라는 오명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의 다른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마태는 유다를 "레베오, 성을 다대오"(마10:3)라 불렀으며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막 3:18). 그러나 누가는 그를 그대로 유다라고 했다. (눅 6:16/행 1:13) 두 사도의 명단을 비교해 보면 세 가지 이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된다.
유다의 가족관계는 알려진게 별로 없다.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Jerom)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유명한 학자였다. 제롬은 다대오라는 제자에 관해서 "세 이름을 가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본 론
1.생애
성경에는 열 두 제자의 명단이 언급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 사람이 등장한 예가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별명을 붙이면서 "성경에 꼭 한 번만 나타난 제자"라는 표현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롯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말씀에서 "가룟유다가 아닌"이라는 부분을 잘못 읽어 "가룟유다가"라고 읽게되면 안됩니다. 가롯인이 아닌 유다는 "예수님이 메시야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나타내 주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왜 안나타내시려 합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내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저와 함께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3,24절)
이 말씀에서 예수께 질문을 하는 모습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유다 다대오라는 인물이 출현하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1)성격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어떤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합니까? 대체로 머리가 좋고, 공부에 대한 향학열이 있는 사람만이 질문을 하게되는 것이지, 아예 공부하는 것에 관심도 없는 사람은 질문을 안 합니다.
어떤 상황에 굉장한 관찰력이 있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라는 점을다데오의 질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질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라는 사실을 제자들인 우리에게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보여 주시고, 확신시켜 주셨으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 자신을 왜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일종의 선교적관심을 지닌 질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자기만독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는선교적 차원으로서 포용력이 넓은 제자임을 알 수 있다.
2)별명
어떤 사람의 별명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별명이라는 것은 내 습관이나 취미, 그리고 사람됨이나 특성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별명에 담겨진 것은 다대오라는 말의 뜻은"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이다. 다대오라는 말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인 레비야스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명사[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슴은 어떤 깊은 마음이나, 심성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혹은 "사랑스러운"그리고 "가슴"이라는 두 별명의 뜻에서 사랑과가슴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며 그리고 깊이 있고 조용한 자신의 어떤 가슴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던 이미지를 가진 제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줍니다.
이 사람의 인물됨을 초대의 어떤 교부가 기록한 책 가운데서 아주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만큼 신빙성 있는 그런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단서로 채택될수는 있는 그 문서에 보면 단편적으로 열 두 제자의 인물 비교를 하는 장면에 이런기록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롯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이다.
또 가롯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다."
가롯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값 비싼 옥합을 깨드렸을 때에그 기름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불평을합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유다 다대오는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이 떠들썩하면서 소리지르고 흥분할 때도 유다 다대오는 말없이 고요하게 한 구석에 있었던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아우성을 칠 때도 어느 편에도 감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을때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가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이름 값을 하지 못했고, 다대오 유다는 정말 이름 값을 했던 제자입니다. 문서는 모든 제자들의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인물 연구를 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요한이 [적극적인 사랑의 사도]라면, 이 유다는 [조용한 사랑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떠들썩하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제자들을 화목하게 만들었고, 주님을 찬양하며 불평과 원망대신에 자기의 할 일을 꼬박꼬박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호칭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의사인 누가]를 부를 때 그이름 앞에 애칭을 붙여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자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다대오 유다, 사랑받고 있었던 유다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유다, 사랑하는 유다여"라고 문서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람이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앞에 나와서 설친 사실도 없고, 여진히 조용하게 자기분수를 지키면서, 그러나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이름이 없었지만 고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참 좋으느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리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벽을 쌓으려고는 하지만,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벽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래서 벽 뒤에 숨고 상대을 벽 뒤에 물아 붙이려는 그런 세대의 풍조는 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는 조용하지만 열 두제자 가운데서 얼마나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2.순교
시리아로,아라비아로,페르시아로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중심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그 도시에서 그는 정말 놀랍고 눈부실만한 선교 활동을 한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돌로매라는 제자와 둘이서 동역하면서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해외 선교를 나갔다가, 시리아라는 곳에서 칼을 맞아 마지막 순교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3.교훈
다데오에게는 특기가 없습니다. 어떤 굉장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을 인도할 만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닙니다. 또다른 제자를 전도하는 일 가운데 앞장을 섰던 제자도 아닙니다. 많은 제자들에게서 주의를 끌만한 두드러진 인물이나 개성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열 두제자중에 한제자로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인격의 질적인 특성때문에 유다 다대오라는 제자가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필요하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데오의 삶을보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훈련을 배웁시다. 오늘날 주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신앙을 떠나서 자기 신념을 믿어야 한다는 식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기독교 신앙이 수용하기가 곤란하고 난처한 이론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삶을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밝은 면을 바라보는 습관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두운 곳을 쳐다보게 되면 불평할 것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불평할 어떤 일들이 우리의 생활 중 없는 때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유다 다대오는 늘 밝은 면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찬양과 감사와 그리고 조용한 섬김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밝은 면만을 바라보는 훈련! 성도들의 교제에 있어서도 내가 상대방의 밝은 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다.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 컵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물이 이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컵의 물이절반 이상이나 찼다고 감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은 똑같은 물이지만, 양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같은 양의 물이지만, 두 사람에게 전혀 다른 반응과 자세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 그 자체의 밝은 면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안ㄹ 수가 없습니다.
2)삶의 동기에 있어 이기적인 욕망보다도 이타적 사명이 얼마 만큼 내 삶의
동기가 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 내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이기적인 욕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불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얻고 내가 인정을 받는 그런 것이 더 커다란 동기가 아니라, 이타적 사명인 남을 유익하게 만들며 다른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이것이 더 커다란 삶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우리는 삶을 건강하게 긍정하면서 살려는 자세가 확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3)우리가 인생을 긍적적으로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과 감사를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가장 작은 것에도,가장 사소한 것에도 늘 주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그래서 주님의말씀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을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 많이 주님을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더 많이 감사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항상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로운 삶의 이 두가지 요소는 성경에 거듭 강조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과 감사입니다. 내 마음속에 얼마 만큼 찬양이 넘치고있는가, 그리고 내 마음속에 얼마만큼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들을 향한 감사가있는가라는 것이 승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한 두번, 또는 이따금씩은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지만, 어떻게 늘 찬양하고 감사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 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기록하면서 항상 감사할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라는 19절의 말씀은 "계속하여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찬양하며 계속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승리로운 삶의 중요한 비밀로서 에베소서 5:18의 말씀을 그 대답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말씀은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술 취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술취해서 생기는긍정적인 현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술 취하면 기분이 좋게 되고 또 노래하는현상이 나타납니다. 술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계속적으로 갖게되는 삶이 찬양과 감사를 강조하는 삶입니다. 계속 노래하고 기분이 좋으려면 술취한 사람들은 계속 마셔야 합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면 비로소 항상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계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참으로 저를 지배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열망 가운데서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바치고 정말 주 앞에 순종하기를 원할 때, 성령께서는 내 자신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욱 나를 지배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고 내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리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유다 다대오의 삶이 가능할수가 있습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이 제자는
"이름은 없었으나 이름 값을 하고 간 제자,
이름 없이 빛도없이 주님을 섬긴 제자,
유명하지 않았으나 필요했던 제자"
이러한 이유로 이 제자를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 한 몫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는 베드로같이 될 수 없습니다.나는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시킬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얼마든지 우리 가운데 유다 다대오는 될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록 유명한 사람이 안 되어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면 내 이름 값을 다하여 조용히 이름없이 모든 것을 긍정하고 이 삶을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더 많은 베드로보다도 더 많은 유다다대오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문화의 가장 심각한 약점 중의 하나는 졸병이 없는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 목사 한 사람이 우리 문화를 가리켜서 "졸병이 없는 문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어린 아이에게 "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보면 거의 전부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답합니다. 다 대통령이 되면 졸병은 누가 합니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행복한 졸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대통령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 가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의 하나는 부목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목사가 없겠습니까? 사실 부목사님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목사를 천직으로 생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나는 머리가 될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지도자를 돕는것이 내 직분입니다. 여러가지로 내 천성이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생각할때 나는 이 자리에서 이 위치를 지키면서 일하다가 죽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래서 겸손히 그 위치에 서서 평생을 그일로늙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는 말입니다.
미국 교회에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 부목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직분으로평생을 늙어 가면서도 그냥 기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부목사들은 그 직분을 원목이 되기전의 실습과정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머리 역할을하려고만 하면 누가 손의 일을 하며, 누가 발의 역할을 하고 누가 심장의 역할을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모든 직분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머리는 하나만 있으면족합니다. 저는 이 문화 비평가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국 교인들에게 필요한말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졸병이 없는 문화,,발이나 팔의 역할을 안맡으려고 하는 문화" 이것이 한국 사회의 비극이며 교회의 비극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베드로가 필요하지만 더 많은 유다 다대오가 필요합니다. 이름 없이빛도 없이 주를 섬기는 더 많은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표면에서 일할 사람은 하고, 숨어서 일할 사람은 숨어서 일해야 하며 저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주의 이름만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만 확장될 수있다면 그냥 기브고 그리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도를 구하는 우리에게 유다 다대오와 같은 아름다운 주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도록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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