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인가? 쇼인가? (A.W.토저) - 2부
이 글은 A.W. 토저의 저서 "예배인가? 쇼인가?"에서 발췌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2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라
★ 8장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예배와 경외심
경외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경외심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가식적인 음성으로 말한다고 해서 경외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배의 신비적 요소
각 사람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활동과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너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제3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예배보다 낭만에 빠진 사람들
복음주의적인 교회 어디서나 음란한 이 시대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집회에서 부르는 많은 곡에서도 성령님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더 지배적이다.
그리스도를 모신다고는 하지만 그분에게 나타내는 친밀감은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것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분에게 순종하거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고,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최대한 그분의 면전에서 멀리 도망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는 사람들
하늘나라를 소유한 복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고
마음속 소유욕을 근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이처럼 복되게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물질의 노예가 아니다.
그 방법은 '싸움'이 아니라 '포기'였다.
모든 소유욕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
하늘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복의 필요성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복해야 할 내용은 이런 것이다.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세상적이며, 낮은 도덕적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영적으로 냉랭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숭모하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감탄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숭모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구별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을 그다지 어렵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경이감에 사로잡힌 채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하듯이 의무적으로 경의를 표할 수는 있겠으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분을 예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교회 예배
교회에서 양육된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현재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숭모를 지겨워한다면 죽음 이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타는 신자가 되라
신자들을 불타는 떨기나무가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들은 우리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불을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
하나님을 만나는 위대한 체험을 통해 정화된 사람들이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 9장 참된 예배의 부흥을 주시는 성령을 간구하라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본래 한 인격체는 다른 인격체들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격체 서로간의 온전한 '앎'(인식)이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방의 가능성을 전부 알려면 오랜 기간 동안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알기 위해 보내는 시간을 결코 낭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늘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
지금 이 시점에서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다.
더 많은 교육, 더 잘 짜여진 조직, 더 세련된 장비, 더 발전된 방법,
이런 것들로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시선이 그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바뀌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흔히 뒤따르는 현상은 예배의 열기가 고조된다는 것이다.
예배를 사모하는 복된 현상은 영적으로 새롭게 될 때 일어난다.
★ 10장 나를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송가 작가와 함께 드리는 예배
찬송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이 계시된 진리,
또는 성취된 사실을 보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찬송가는 그분의 음성에 대한 음악적 반향이다.
찬송가 작가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높으심과 크심과 거룩하심에
경이감을 느낄 증도 그분에 대해 감탄했기 때문에 그것을 찬송으로 표현했다.
이런 찬송가는 부르거나 그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은사를 부여받은 위대한 신앙인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에 동참하는 일이다.
찬송의 타락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집회에서 그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데는
과거에는, 성경책과 찬송가책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교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소도구와 장치가 동원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노래하는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는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찬양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누군가가 지적했다.
찬송가는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했던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잘못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교리는 찬송에 영향을 끼친다
찬송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발견했다는 것을 찬송 중에 깨닫는다.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의 선생들은 우리가 처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 다음으로는 할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나타나시기를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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