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권하며
지난 초봄, 볼일이 있어 남쪽에 내려갔다가 저자거리
에서 우연히 아는 스님을 보았다.
만난 것이 아니라 본 것이다. 이 스님은 내가 불일암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인데 몇 해 전 길상사를
거쳐 간 후로는 그 거처도, 소식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스님의 맑은 모습이 꽃향기처럼
지금도 남아 있다.
나는 남의 차에 탄 채 지나가는 길이고, 그 스님은 길가
에서 걸망을 메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순간 반가워서 차를 멈추게 했다가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고 호젓이 지내고자
하는 수행자를 불쑥 만나는 것은 아무래도 폐가 될 것
같아서였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해답은 바로 나온다.
누군가 내 거처의 주변에서 나를 보고 알은 채를 한다면,
나 또한 당황하면서 결코 반가운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길가에 서 있었지만 예전에 지녔던 맑은 모습
그대로여서 내심으로 반가웠다.
이런 내 태도를 두고 매정하다고 탓할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출세간의 맑은 업을 익히는 처지에서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못 본 채 그 자리를 스쳐가는 편이
갑자기 마주쳐 저쪽을 어색해 하고 부담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다.
혼자서 외떨어져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공통
적인 그런 벽이 있다.
초기경전인 <장로게(長老偈)>에 이런 구절이 있다.
홀로 있는 수행자는 범천(梵天)과 같고
둘이 함께라면 신(神)과 같으며
셋이면 마을 집과 같고
그 이상이면 난장판이다.
야소자라는 수행자가 읊은 게송이다.
1993년 10월 그 스님이 태백산 각화사를 떠나면서 내게
보내온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를 다룬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을 나는 지금도
서가에 지니고 있다. 그 스님이 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자취가 책장에 베어 있다.
그 스님의 거처를 알 수 있다면 보내주고 싶은,
내가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다. 오랜만에 책다운
책을 읽었다. 한길사에서 펴낸 리영희씨의 「대화」.
이 책은 대화 형식으로 된 그의 인생회고록이며 또한
자서전이다. 우리가 일찍이 겪었던 무지막지하고 야만적인
지난 세월을 거쳐 오면서 투철한 세계인식 아래 자기를
지켜낸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담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기록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지식의 삶 자체가 바로
이 땅의 어두운 현대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50년대 중엽부터 언론인과 대학교수, 사회비평가와
국제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던 리영희씨는 그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으로 ‘자유’와 ‘책임’을 들고 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기 때문에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따를 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아 사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책다운 책을 읽었다. 이런 책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그가 40년 동안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글을 써온 목적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는 ‘진실’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권하는 이유도 우리 시대의
진실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다. 좋은 책이다.
- 범정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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