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랴"
한 선비가 깊은 산속 골짜기에 사는데,
임금이 불러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산 중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솟아나는 동안
그의 산중 생활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전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선비의 삶자체가 청청한 소나무와
맑은 샘처럼 여겨진다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은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떠난 맑고
향기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열린 사람이라면
어디서나 강산과 풍월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내가 가끔 둘르는 한 스님의 방에는
텅 빈 벽에 "여수동좌"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까만 바탕에 흰글씨로 음각된 이 편액이
그 방에 들어설 때마다 말없이 반겨 주는 듯하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랴"
그 방 주인의 맑은 인품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나는 나무판에 새긴 이 편액을 대할 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된다.
옛글 (하씨어림)을 보면 사언해라는 사람은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아 잡스런 손님이
그 집을 드나들지 않았다.
그는 혼자 차나 술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로지 맑은 바람뿐이오.
나와 마주 앉아 대작하는 이는 밝은 달뿐이다."
청풍과 명월로써 벗을 삼았다니
아무나 가까이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그를 가까이하기보다는
그 나름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무례하게 끈적거리고 추근대는
요즘 같은 세태이기에 그런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웃에게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구실을 한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랴" 라고
써 붙인 방에는 찻잔이 세개뿐이다.
세사람을 넘으면 차 마실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산중에서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스르로 물어본다.
사람은 나 하나만으로 충분하니까
사람과 자리를 같이할 일은 없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과 흰 구름,
시냇물은 산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므로
자리를 같이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살갖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 범정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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