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5일 KBS 역사스페셜 “고구려성 만리장성으로 둔갑하다”가 방영되었습니다.
중국은 2009년 4월 만리장성을 동쪽끝 압록 강변 호산까지 연장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호산성은 고구려의 성입니다.
고구려의 성벽의 흔적을 누르고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중국, 그런데 새로 쌓은 성벽아래 전형적인 고구려식 축성법으로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요.
변조되는 동북공정, 정확한 기록까지 무시한채 중국은 고구려의 심장까지 치고 들어온 것입니다.
요동지역 고구려사의 진실은 바로알고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블로그 기자는 역사스페셜를 보고 남한에는 우리가 찾을수있는 고구려 유적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봅니다.
▲고구려 발흥의 중심지까지 연결된 만리장성 ⓒKBS
◈ 아! 고구려~ ~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시조인 동명성왕 주몽이 졸본에 도읍한 나라로 서기 668년까지 28대 705년
간 존속한 우리나라 고대 삼국중 하나입니다.
넓은 대륙을 호령하며 700여년의 역사 속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가슴속에 살아있는 나라였습니다.
만주 벌판과 그리고 평양등 도읍이 있던곳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이 흩어져 있습니다.
장군총, 태왕릉, 벽화고분, 광개토대왕릉비등 고구려인의 웅장한 기개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문화재가 아닙니까?
◈ 남한에는 고구려 유적이 어디에 있을까요?
남한에 소재한 고구려 유적은 서울 한강, 임진강 유역, 충주 중원 지역 등에 일부 분포하고 있습니다.
그중 임진강, 한탄강 유역, 양주분지, 서울 한강유역등에는 소규모 성과 보루와 같은 관방 시설 정도입니다.
삼국의 접경지대로 전략적 요충지에 성곽과 같은 군사시설을 설치한 것이지요.
블로그 기자가 소개하는 지역은 중원 지역의 고구려 유적입니다.
충북 충주을 중심으로 한 중부 내륙 지방은 삼국의 접전과 교류로 독특한 중원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영토 확장의 주도권을 차지하기위한 격전지였지요.
이곳에는 고구려 유적중 축조 흔적이 확실하게 확인되는 중원고구려비(국보 제 205호)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중원 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장미산성(사적 제
400호),온달산성(사적 제264호)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들은 새로운 연구와 발굴 조사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조정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필요성도 있겠지요!
◈ 중원고구려비-남한 유일의 고구려비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충주 IC을 나와 82번 지방도 가금 방향으로 가다보면 입석 삼거리가 나오는데 갈
라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원고구려비(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는 고구려의 중원 진출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로, 충주에 축성했다고 전하는 국원성(國原城)의 존재 사실을 반영하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지요.
국원성은 고구려 남진의 일단락을 짓는 시기의 중요 거점 시설로 이해되고 중원문화 변화에 많은 영
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 형태를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
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고 하지요.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글씨체는 예서풍입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
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합니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
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중원고구려비는 보호각 내부에 안치하고 주변에 안내판과 모형 복제품을 설치하였습니다.
중원고구려비 ⓒ이은정
(위)중원고구려비 보호각 (아래)안내판 및 모형복제품 ⓒ이은정
◈ 장미산성(薔薇山城)-고구려 요소를 확인하는 유적
중원고구려비 뒤쪽으로 장미산성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습니다.
자동차로는 중원고구려비에서 남한강과 나란히 가는 도로를 따라 앙성,여주 방향으로 조금 가면 장미산 어귀에 이르게 됩니다.
장미산성 오르는 길은 좁고 경사가 있어 자동차가 교차되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장미산성은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와 하구암리 사이의 장미산(336.9미터) 정상부에 축조된 삼국시대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남한강을 따라 충주로 진입하는 고대 교통로의 주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미산성에서 내려다보는 탑평리 일대의 경관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신라의 석탑중 제일 높은 국보 제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이 보이고 넓은 잔디밭, 조정지 댐을 만들어
형성된 탄금호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역사, 문화의 관광명소로 각광받는 곳이지요.
조사결과 장미산성은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석축을 쌓았던 것으로 밟혀졌습니다.
지형이 험한 경사면과는 달리 외부 침입이 비교적 용이한 평지에서는 성벽의 폭이 넓고 외벽뿐 아니
라 내벽도 견고하게 축조되었지요.
유물은 백제 유물이 주종을 이르고 있으나 주변의 고구려 유적과의 관계, 산성에서 착두형(鑿頭形) 철
촉등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 발굴된 점은 고구려가 중원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의미가 있습니다.
고구려가 백제의 기존시설물을 점유한 흔적을 확인하는 고구려 요소를 확인하는 유적일까요?
충주 장미산성 ⓒ이은정
충주 장미산성 복원모습 ⓒ이은정
◈ 중원 봉황리마애불상군 - 고구려 불상의 특징적 요소
장미산성을 나와 여주 방향으로 조금가면 38번 국도와 교차하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좌회전하여 국도를 따라 2.4킬로미터 가량 달려 다시 좌회전하여 소로를 따라 1.6킬로미터
가량 진입하면 우측으로 마애불상군이 있는 해골산이 보입니다.
중원 봉황리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 중턱의 비탈진 바위면 두 곳에 돋을
새김기법으로 조성된 불. 보살상군입니다.
마애불상군 앞쪽으로는 봉황천이 흐르고 넓은 봉황들을 넘어 동쪽으로는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이 멀리 내려다보입니다.
오르는 길은 계단이 놓였고 철난간도 만들어졌는데 기울기가 45도가 넘어 조심 하여야합니다.
지금처럼 철난간이 없으면 불상군을 정상적으로 볼 수는 없겠지요.
마애불상군은 하나의 큰 바위로 연결되어 있지만 중간에 깨어진 곳을 경계로 우측에는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한 5구의 보살상이 조성되어있고 좌측에는 여래좌상과 공양상. 사자상이 배치되어있습니다.
불상들이 있는 암벽 위쪽에는 다른 암반이 튀어나와 있어 천연의 지붕 구실을 합니다.
반가상 우측의 보살상들은 원근감을 살리기 위해 앞뒤로 중첩하여 배열한한것이 특징입니다.
한편 마애불상군 위쪽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바위 면에는 약 2미터 크기의 마애불좌상이 단독으로 조
성되어있습니다.
마애불좌상 앞에는 넓은터가있고 공양단을 쌓았던 흔적도 있습니다.
오래된 기와 조각도 있어 이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마애불상군이 한때는 박락 및 균열이 이루어지고 틈새로 물이 흘러 위험요소도 있었는데 신속한 보존처리가 이루어졌지요.
마애반가상과 불.보살.공양상 전경 ⓒ이은정
마애반가상과 불.보살.공양상 세부 ⓒ이은정
마애불좌상 전경 ⓒ이은정
◈ 온달산성 -「삼국사기」 온달열전의 주인공 온달 축조
온달산성(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은 중앙고속도로 북단양IC을 나와 단양읍을 지나 고수대
교을 건너 영월방면 59번 국도를 이용하다 고씨동굴 방면 595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온달산성 입구에 도착합니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구불구불 꼭대기를 감아 도는 성벽 자락이 보입니다.
남한강의 최상류에 위치한 온달산성은 산 정상부에 위치한 퇴뫼식 석축 산성입니다.
신라식으로 축조된 온달산성은 「삼국사기」온달열전의 주인공인 온달이 축조한 성으로 알려지면서 고
구려와의 관련성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곳은 삼국시대때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분쟁이 있던 곳으로 성안에서 삼국의 유물이 출토되었지요.
성벽은 납작한 점판암으로 벽면뿐 아니라 속채움까지 돌로 쌓았는데 지형을 따라 부드럽게 곡면을 그
리며 감겨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온달산성위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은 크게 휘감으며 흘러갑니다. 멀리 영춘면 소재지인 상리와 그 너머
로 산줄기들이 겹쳐 보입니다.
성벽일부를 바깥으로 내밀어 쌓은 稚(치)는 북문 근처에 새로 보수하였고 남서쪽에 두 곳이 더있습니다.
성안쪽의 물이 내려오는 수구 모습도 있습니다. 사다리꼴로 쌓은 수구 위쪽에는 다른 성돌보다 크고
든든한 화강석을 고여 그 위에 성벽을 받게 하였습니다.
성안에는 잡목, 소나무 등이 자라고 토기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온달산성 ⓒ이은정
온달산성 부분 모습 ⓒ이은정
KBS 역사스페셜은 요동의 고구려사가 위험하다고 하였습니다.
문화재는 한번 원형을 잃으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은 많지 않습니다.
고구려 유적을 새롭게 정립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계속이어져야합니다.
▲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은정 기자
'문화재,도자기,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유만만 ~ 남한강 옛절터 거닐어볼까요? (0) | 2011.02.07 |
---|---|
'도산서원상덕사부정문급사주토병'이 무엇일까요? (0) | 2011.02.07 |
딱 하루 열린 山門 문경 봉암사를 가다 (0) | 2011.02.07 |
천불천탑 운주사, 곳곳에 아로새긴 민중의 소망 (0) | 2011.02.07 |
“인천, 도시속의 과거 공간 -인천도호부청사와 인천향교 (0) | 2011.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