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도자기,사찰

딱 하루 열린 山門 문경 봉암사를 가다

문성식 2011. 2. 7. 02:41

 

 

속세와 아득히 떨어져 더욱 아름다운 마음속의 산사, 많은 명승들이 참선하던 천년의 고찰, 문경 봉암사...  그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곳입니다.

하지만 1년 중 딱 하루, 석가탄신일에는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딱 하루 열린 山門 사이로 청정도량이 세상에 말을 건넨다고 하니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봉암사 ⓒ이은정 

 

 

 

봉암사 가는 길

 

몇 년 전부터 봉암사 가는 길은 차량 통제를 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차량은 거리에 관계없이 멈추

는 곳이 주차장이됩니다. 도로가 제 기능을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셔틀 버스를 타기위해 무한정 기다리는 마음이나 봉암사까지 걸어가는 일은 힘든 수행이

라 할 수 있겠지요.

봉암사를 품고 있는 흰 바위산은 희양산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하

는 암봉이지요.

봉암사 입구 오른쪽 너럭바위에는 최치원이 썼다고 전하는 초서체 글씨 야유암(夜遊岩)이 새겨져있습

니다. ’밤에 노는 바위‘라는 뜻에 걸맞게 풍류가 넘쳐흐릅니다.

 

희양산(위)  전)최치원의 글씨(아래)  ⓒ이은정

 

 

 

문턱 높은 절간 들어가다

 

문턱 높은 절집을 들어갑니다.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구가 번뜩입니다.

그동안 봉암사는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였지요.

그래서 지금 같은 숲을 간직하며 자연과 하나 된 삶으로 생명의 가치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았

는지도 모르지요.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 나무에 달아놓은 연등이 예스러움을 더해줍니다.

대숲에서 서걱거리는 바람소리, 계곡물소리 들으니 이곳이 청정도량임을 느끼게 합니다.

 

일주문과 아름다운 자연 ⓒ이은정

 

 

봉암사는 침묵의 세상

 

봉암사 경내로 들어서는 침류교을 건너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산사로 들어갑니다.

봉암사는 천년의 고찰로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수행선원입니다.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한곳에 모여 스스로 수행 정진을 하고 있지요.

숲에 포근히 안기듯 자리한 봉암사(鳳巖寺)에서 맞는 아침은 더 없이 고요합니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퍼지는 목탁소리는 희양산에 부딪혀 산울림을 만듭니다.

딱따구리 나무 찍는 소리도 들립니다.

지나가는 스님은 외모를 보니 정진중인 것 같은데 걸어가는 자세 자체가 수행의 길에 오른것같습니

다. 깨달음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지증대사가 창건한 봉암사

 

백두대간 줄기인 희양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의 고찰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 지증대사가 창건하였

고 지금까지 부처의 마음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신라 말의 고승 지증대사는 이곳을 둘러보고 “스님들의 수도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떼의 소굴이 될 자

리”라며 봉암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후 구산선문 희양산파의 종찰이 되었지요.

몇 번의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여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수도승들이 도를 닦았다는 사찰입니다.

금도 많은 승려가 선(禪)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한 스님은 봉암사를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치장하지 않아도 자체에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

 

해방 직후인 1947년에는 성철스님을 비롯해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등이 봉암사에서 한국

불교를 바로잡자고 다짐을 하고 수행에 들어갔지요.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불교정화운동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봉암결사입니다.

성철스님 등은 스님들이 손수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등의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제정하는 등 지금의 수행가풍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산문을 아예 걸어 잠근 것은 1982년입니다.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해왔지요. 먹고 살만 하니 관광객들이 몰려와 수행에 지장을 주자, 죽

기 살기로 수행하던 수행자들이 희양산을 막았다고 합니다.

전국에 딱 하나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도량을 만들자고 했지요.

이때부터 봉암사가 조계종의 특별 수련원이 된 것이라 고합니다.

지금도 봉암사는 끔쩍도 안하는 사찰로 오직 스님들은 정진뿐이라고 합니다.

 

 

봉암사 숲

 

훼손되지 않은 봉암사 숲의 자연생태는 원시 그 자체로서 국내최고의 야생동물 서식처입니다.

야생동물들이 봉암사 숲에서 스님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지요.

봉암사 숲이 보존된 것은 스님들의 생명사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스님들은 개미가 다니는 길목에 막대기를 놓아 개미가 마음 놓고 이동할 수 있게 배려도하고 추운 겨

울에는 야생동물에게 먹이도 주고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스님과 야생동물 사이의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부처의 뜻이 생명을 만드는 것일까요?

 

봉암사 숲 ⓒ이은정

 

 

 

봉암사 문화재는 우리 삶속에 살아있다

 

우리나라 국보 중 탑비(塔碑)는 많지가 않은데 올해 국보 제315호로 지정된 것이 봉암사 지증대사 적

조탑비입니다.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탑비로 비문은 신라시대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지

었고, 분황사의 혜강 노스님이 글을 쓰고 새겼습니다.

탑비는 한국 고대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지증대사적조탑은 규모가 큰 부도로 조각이 선명하며 아름답습니다.

특히 중대석에 새긴 사리함, 공양상과 주악상은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조각이 세련되었지

요. 깊게 새긴 돋을새김의 정교한 조각솜씨는 가벼운 장식성이 아니라 치밀한 성실성을 느끼게 합니다.

 

금색전 앞마당 한가운데 들어앉은 3층 석탑(보물 제169호)은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귀중한 탑

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게 보입니다.

 

극락전(보물 제1574호)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목탑형식을 간직한 불전입니다.

17세기에 불에 탔다가 다시 중건됐을 때 옛 모습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형식만 갖추었습니다.

이층지붕을 한 극락전은 아무리 봐도 건물의 자태가 반듯하다는 생각입니다.

 

극락전뒤 사이 길로 오르면 숲속에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환적당지경탑, 함허당득통지탑 그리고 추정하는 설봉의 부도가 있습니다.

3기의 부도가 있는 곳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조금 이동하면 정진대사원오탑(보물 제171호)이 있습니

다. 지증대사 부도를 모방했는데 조각을 대폭 생략한 중대석이 특이합니다.

정진대사원오탑비(보물 제172호)는 산 아래 평지에 세웠는데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 되었으며 조각

기법이 퇴화되었고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명필 장단열이 글씨를 썼습니다.

탑과 탑비사이에는 석종형 부도(문화재자료 제134호)가 한기 있습니다.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10분정도 가면 백운대를 만납니다.

봉암사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집채만 한 바위 한쪽 면에 마애보살좌상(도유형문화재 제121호)

이 조각돼 있고, 그 앞 너럭바위 위로는 얼음보다 차가운 계곡물이 세차게 흐릅니다.

한 폭의 수묵화가 따로 없습니다.

고려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보살좌상은 봉암사를 굽어보듯 희양산을 쳐다보듯 미소 지

으며 그렇게 수백 년을 용맹 정진하듯 앉아 있습니다.

마애불 아래쪽 암반을 두드리면 퉁퉁 목탁소리가 납니다.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이은정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이은정

 

삼층석탑,극락전,부도  ⓒ이은정

 

정진대사원오탑과비 ⓒ이은정

 

마애보살좌상 ⓒ이은정

 

 

원래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봉암사는 큰 스님들이 목숨 걸고 수행하던 곳입니다. 평소에 엄하고 무거운 기운이 감도는 청정도량이지만 석가탄신일 하루만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열린 도량이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사찰림은 지난 30여 년 동안 원시적 자연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에 거스르지 않고 사람과 아름다운 동거를 하는 곳이 봉암사입니다

문경 봉암사는 일 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까요?

 

 

 

▲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은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