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속죄론 (贖罪論)

문성식 2021. 5. 9. 17:40

 

      론 (贖罪論)

 

 

 4. 속죄의 효력 (The Efficacy of the Atonement)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이 인간들에게 어떤 결과를 갖어 오는가? 인간의 체험 속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a) 죄의 용서 (Pardon of Transgressions)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을 통하여 우리들이 갚을래야 도저히 갚을 수 없었던 빚을 갚게 되었고 과거의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이미 그의 죄가 도말되고 제거 되었음으로 죄악된 그의 과거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 다니지 않는다 (요1:29,엡1:7히9:22-28,계1:5). 그는 새로운 삶을 출발했기 때문에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결코 과거의 죄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요5:24).


(b) 죄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Sin)

속죄를 통하여 신자는 그의 과거의 죄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된다. 이 문제는 로마서 6장으로부터 8장까지에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유대인 가운데 그의 주장에 반대하고 일어 설 자가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만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죄를 경시할 것이 아니냐고 그들이 바울에게 도전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6:1) 바울은 이와 같이 잘못된 신앙관을 거부하고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의 신앙으로 인하여 죄와 완전히 깨끗히 절연한다고 즉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구세주를 믿는 산 신앙의 결과는 죄악된 낡은 것을 십자가에 목박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는 사람은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확신하고 전심 전력을 다하여 죄를 물리칠 것이다. 십자가는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나 유혹자인 마귀는 분주히 돌아 다니며 인간을 유혹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또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끊임 없이 자지 않고 깨여 경계하며 날마다 죄악의 충동을 십자가에 못박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롬6:11). 이와 같이 하면 승리는 확실한 것이가.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6:14). 즉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인간이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빚이된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빚이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은혜는 죄인을 위하여 어떤 것 즉 갈보리 언덕의 완성된 구속 사업이 행하여진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행하여진 바를 믿을 것 같으면 그를 위하여 행하여진 바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강력한 우방을 갖고 있는데 그는 곧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내주하면서 그를 하여금 죄악의 충동을 분쇄하도록 협조하여 주시며 또한 기도하도록 도와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승리와 자유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 주신다 (롬8장).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장벽을 무너드려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의 생활 속에 들어 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갈3:13,14).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신자는 성결과 성령의 살려주시는 체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딛3:5-7). 옛날의 죄악 된 생활에 대하여 죽고 새로 중생하여 물로 나게 되고 (깨끗히 씻음받은 체험) 영으로 나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음) (요3:5).


(c)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Deliverance from Death)

죽음에는 육체적 의미와 영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의미에 있어서 죽음은 육적 생명의 종식을 가르킨다. 따라서 육체적 죽음은 질병과 자연死와 기타 돌발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죽음은 영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리는 형벌을 뜻한다. 또 영적 죽음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영적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회개치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격리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영원한 격리는 곧 둘째 사망을 뜻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다만 육체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였다면 그 말씀이 당장 성취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도 계속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말 속에 죄악의 온갖 형벌의 결과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불안,죄악의 경향성,육체적 연약성 종국적 육체의 죽음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때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언은 참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다고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육체적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나추어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그는 신성을 지니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능히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실이 가능케 되었는지 우리들은 알 수 없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으 신비로 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우주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서도 기정 사실로서 받아 드리고 있다. 전기가 어떤 것이며 또한 전기의 작용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전기가 제공해 주는 혜택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속죄의 문제를 마치 수학 문제처럼 논증할 수 없다고 속죄의 은혜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히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자 상에서 몇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시며 돌아가신 그 죽음에 그 중대한 의미와 죙악의 형벌의 암담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절망의 부르짖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와 같은 부르짖음은 결코 순교자의 말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순교자는 하나님게서 같이 계심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부르짖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격리되는 것을 체험하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곧 이 행위는 죄를 짊어지는 행위이다 (고후5:2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육체적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롬 8:10). 그러나 그들이 죽는 것은 죄으 형벌로서가 아니라 보다 큰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참되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6).


(d) 영생의 선물 (The Gift of Life Eternal)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멸망치"않고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멸망이라는 말은 영적 멸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3:14-16,롬6:23 참조). 영생이란 것은 다만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뜻한다. 곧 영생은 하나님과 화목하여 그와 교제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과 불목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교제를 갖는 것이 곧 영생이다.왜 그러냐 하면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현세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또한 영행을 미래의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곳도 있다. (딛1:2,롬9:22).

그 이유는 장차 하나님과 맺는 교제야말로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이 그의 얼굴을 보리라."


(e) 승리의 생활 (The Victorious Life)

십자가는 발전기와 같은 것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전력을 이르켜 기독교인의 생활에 자극을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것이라"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은 십자가의 위력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기독 교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그의 영혼의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 향한 참다운 회개를 고취시킨다. 범죄를 하고 나면 거기에는 자책과 치욕과 분노 같은 것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죄를 진 데 대하여 참으로 뉘우치고 슬퍼하는 곳에 참다운 회개가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각은 저절로 생겨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정신을 어둡게 만드는 죄의 본질 속에 있기 때문이다.

죄인은 회개를 위한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다. 즉 다시 말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얻게 되었으며 또한 잘못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할 수 있는 어떤 자극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회개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는 죄가 무섭다는 것을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초래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또한 죄의 무서운 형벌을 나타내 주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나타내 주었다.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의 자녀들이다. 저들의 회개는 저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저들의 회개는 죄가 어떤 것이며 또한 하나님으 사랑이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는가를 나타내 주심으로써 저들의 영혼 속에 일어난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큰 환난을 겪은 어떤 성도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이 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7:14).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은 죄를 항거하였음으로 지금은 깨끗게 되었다. 저들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는 힘이 갈보리 언덕에 계시 되었다. 십자가의 능력이 저들이 마음 속에 들어가서 역사함으로써 죄를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갈2:20 참조)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12:11).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들을 강권하여 저들로 하여금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압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가 저들의 배후에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 있었음으로 저들은 패비하지 않았다. 저들은 저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에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저들의 비겁으로 인하여 감히 배반할 수 없었다. 저들은 그의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는 저들의 것이다.

이 승리의 생활 가운데는 사탄을 이기는 승리가 포함되어 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은 대신하여 사탄을 정복하였다고 선언한다 (눅10:17-20, 요12:31,32,14:30, 골 2:15,히2:14,15,계12:11). 기독 교인들은 마귀를 이기는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한,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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