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속죄론 (贖罪論)

문성식 2021. 5. 9. 17:26

 

     속죄론 (贖罪論)

 

 

 2. 희생의 본질 (The Nature Sacrifice)

 

이와 같은 희생의 근원적인 제도는 왜 인간들은 어느 시대 어느 것에서나 희생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 이유를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비록 이바인의 희생은 본래의 모범에서 의곡되기는 하였지만 희생의 두 가지 근본 사상인 예배와 속죄에 근거를 두고 있다.

(1) 인간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 신의 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신의 이와 같은 권리를 인정하여 자기 자신을 신 앞에 복종시키는 표시로서 인간은 예물 또는 희생을 신 앞에 바친다.

(2) 그러나 때때 로 인간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본능적으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때 만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다시 원만히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자기는 신의 노염을 사서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동물을 잡아 그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피하는 동시에 신의 은총을 받고저 하는 제사 행위는 고대인의 가장 뿌리 깊은 신앙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저들이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배웠을가?

 

바울은 저들이 하나님을 알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였다.(롬1:21).

마치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자죽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이방인의 희생에도 하나님의 계시의 자죽이 남아 있다.

언어에 혼동이 있은 후에 (창11:1-9) 노아의 자손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가지 우상 숭배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흩어질 때에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갖고 흩어졌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간들은 온갖 죄를 범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매우 간략하게 롬 1:19-32은 기술해 주고 있다.

 

많은 민족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곧 다시 말하면 저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천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그 천세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또한 저들은 나무나 동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신 것을 깨닫는 대신에 도리어 이 자연물들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저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게 되자 저들은 자연히 우상을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우상 숭배는 결코 지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방 종교의 근거가 되는 자연 숭베의 사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정욕을 신으로 삼아 그 결과는 도덕적 부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타락하였을지라도 인간의 예배 의식을 살펴 볼 것 같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보다 잘 알고 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다. 애굽이나 인도나 중국의 우상 숭배를 돌이켜 볼 곳 같으면 만물을 창조하신 영원한 영인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온 세상이 도덕적 부패로 가득 차 있었던 것과 같이 영적 어두움이 온 민족 위에 뒤덮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舊세계의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시작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을 사용하여 새로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의 빛을 이 세상에 다시 비추어 줄 한 민족의 조상으로 삼았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이방인 민족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의 도덕적 생활과 국민적 생활과 종교 생활을 다스릴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

 

이 여러 가지 율법 가운에 희생의 법 (The Laws of Sacrifice)이 포함되어 있다. (레1: - 7: 까지) 이 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배 의식을 타락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전한 예배 의식을 타락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전한 예배 의식을 회복시켜 주었다.

모세의 희생의 제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창조주에게 대한 제일의 의무인 예배를 드리는 수단이었다. 저들이 이와 같은 희생의 제물을 드린 목적은 하나님과 저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저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에 저들은 속죄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또 자기 이웃에 대하여 죄를 범했을 때에는 속건제를 하나님께 드렸다.(레 6:1-7)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원만하게 회복하고 나서 저들은 자기 자신을 다시 헌신하기 위하여 번제를 드렷다 (레1장)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아 다시 용납되어 하나님과 행복하고 즐거운 교제를 회복하고 나서 그는 화목제를 드렸다. (레3장)

이와 같은 피의 제사의 목적은 온전한 희생의 제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대속의 죽음이다.(고후5:21)

여호와께서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셨다 (사53:10). 그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갚으셨다. 그리고 또한 그는 우리의 죄악된 과겨를 깨끗이 씻어 주셨다. 그는 우리들의 번제물이시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온전히 생명을 바쳤기 때문이다.(히9:14,엡5:2).

그는 우리들의 화목제가 되신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만들기 위함에서 였다. (요6:53-56,레7:15,

20 참조).

 

3. 희생의 효력

어느 정도까지 구약의 희생을 효력을 발생하였는가? 구약의 희생은 실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며 깨끗이 씻을 수 있었는가? 이와 같은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러냐하면 레위인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비교하고 대조하여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된다는 점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히브리서는 잘 다르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핍박을 받고 실망 낙담하여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 행위를 다시 하고저하는 히브리 교인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성전의 화려한 예배 의식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같이 보일지라도 저들이 믿는 실재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교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돌리기 위하여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여 새 언약이 옛 언약 보다 영원한 것이며 완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제사장과 동물의 희생이 있는 성전의 예배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은 그림자를 잡기 위하여 실체를 저버리는 행위요, 불완전한 것을 붙잡기 위하여 완전한 것을 버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히브리서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논한 것을 볼 것 같으면 옛 언약도 그 설정 목적에 있어서 좋은 것이나 새 언약은 보다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a) 구약의 희생의 좋은 것이었다.

만일 구약의 희생이 좋치 않은 것이였다면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정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의 희생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일정한 목적을 성취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좋은 것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여호와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한 후 다시 은혜의 상태로 돌아가 그와 화목을 누리고 원만한 교제를 갖게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희생의 모든 조건을 수행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약속을 의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숙죄한 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4:26).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제물들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회개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지시해 줄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히9:22). 그러나 한편 저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마음의 올바른 자세들 갖추지 않고 드리는 예배 의식은 하나의 무가치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희생의 제사 행위는 즉 다시 말하면 상한 심령의 희생에 대한 외적 표현이어야만 한다 (시26:6,50:12-14,4:5,5:16,잠21:3,암5:21:24,미 6:6-8,사1:11-17 참조). "악인의 제사 (피의 희생)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 고 솔로몬은 선언하였다.(잠15:8).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들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드리는 의식의 행위는 하나님게서 받아 드리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b) 신약의 희생은 보다 좋은 것이다.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의 제사를 하나님게서 정하신 것이라고 시인하면서도 개화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의 희생이 속죄의 완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1. 비이성적이고 무책임한 동물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과는 크게 다르다.

동물들은 이지적으로 또는 자진하여 희생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희생을 드리는 자와 희생의 제물 사이에는 하등의 교제도 없었다. 동물의 희생이 인간의 영혼에 중요성을 줄 수도 없고 또한 속 사라에게 영적 능력을 줄 수도 없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비이성적인 동물의 피가 인간의 영적 구속에 하등의 영향도 줄 수는 없다. 완전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의 제물고 드림으로써만 인간을 영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는 구약의 신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4). 기껏해야 동물의 희생은 보다 온전한 속죄의 수단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를 깨닫게 되었다.(롬3:20).

그리고 이와 같은 희갱의 제물은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이르키게 할 죄를 무력하개 만드는데 불과하였다.

 

2. 동물의 희생을 가르켜 "육체의 예법"이라고 하였다.

곧 의식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죄의 외적 행위만을 사하였다. (히9:10). 그러나 그속에 영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였다. "염소와 황소의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켜 하여 거룩케 하거든"(히9:13). 즉 다시 말하면 동물의 희생은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한 이스라엘 사람을 격리케 하는 외적 더러움을 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육적으로 자기 자신을 더럽게 하였을 것 같으면 그는 다시 자기 자신을 깨끗게 하고 제물을 바칠 때까지 그는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격리되었던 것이다. (레5:1-6).

또 만일 그가 물질적으로 자기의 이웃에게 해를 입혔을 것 같으면 속건죄를 드릴 때까지 그는 저주 아래 있었던 것이다 (레6:1-7).첫째 경우에 있어서 희생은 육체의 더러움은 씻을 수 있었으나 영혼을 깨끗게 할 수 없었다. 둘째 경우에 있어서 희생은 외적 행위는 속할 수 있었으나 마음의 변화를 이르키지는 못했다. 다윗 자신도 동물의 희새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영적 소생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시51:6-10).

 

3. 동물의 희생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드려 왔다는 사실 부터가 이 희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동물의 희생이 희생을 드리는 자를 완전케 할 수 없었다 (히10:1-2). 즉 다시 말하면 이 동물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수립하는 인격을 함양할 수 없다. 이 동물의 희생으로 새로운 삶의 발단이 될 수 있는 영적 변화르이 체험을 단번에 할 수는 도저히 없다.

(히10:10).

 

4. 동물의 희생을 드린 제사장들도 완전치 못한 존재들이였다.

그들이 불완전한 임무를 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들이 언제나 마음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은 예배자들을 온전히 직접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9:8) 제사장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적 체험을 갖게 할 희생을 갖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히9:9).

만일 어떤 영적 이스라엘 사람이 구속에 대한 자기의 소망에 대하여 질문을 할 것 같으면 그는 동물의 불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그 문제의 해결은 미래에 가능하다는 것과 완전한 구속은 메시야의 출현과 더불어 도래할 완전한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참으로 예레미야 선지는 이와 같은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그의 백성들이 율법의 언약을 언제까지나 늘 지킬 수 없으리라고 실망하였다. 이 백성들의 죄는 철필로 기록되었다.(렘17:1)

또한 그들이 마음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 (17:9) .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돌리킬 수 없었으며 (렘13:23)

 

또한 그들이 마음이 너무나 타락하고 냉담해져서 그들이 아무리 희생의 재물을 드려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렘6:20). 참으로 그들은 희생의 참다운 목적으로 잊고 있었다. 인간의 안목으로 바라볼 때에 그들은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가 임할 때에 백성들의 마음이 변하여 죄의 용서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를 위로하였다. (렘31:31-34).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우리들은 히10:17,18 속에서 조금 전에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의 영감된 해석을 읽어 볼 수 있다. 즉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완전한 희생의 수단에 완전한 속죄가 성취 되었음으로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은 필요 없게 되었다. (히10:6-10 참조).

 

이 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인간은 단 번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체험을 갖게 되었다. 율법의 희새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에 의하여 성취하였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펀에 앉으사." (히10:11,12).

5.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업이 완성되기 전에도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받은것은 확실하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았고 (롬4:23).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 (마8:11,눅16: 22). 모세는 영광을 받았고 (눅9:30,31).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하였다.

 

이와 같은 영적 상태에 도달하기에 합당한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 동물의 희생은 불완전하고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완전한 희생이라고 인정하고 나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어떤 것에 근거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을가?

오늘날 인간들이 성취된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이 저들은 미래의 희생을 미리 내다보고 믿었기 때무에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에 대한 논증을 히9:15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롬3:25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급하여 효력을 발생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그의 죽음은 과거와 관련하여 효력을 나타 냈다.

히9:15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옛 언약은 완전한 속죄를 주기에는 무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주셨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게서 구약 시대의 신자들을 의로운 것으로 여겼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미리 예상하시고 하신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과거의 모든 빛을 갚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으로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새 언약이 오면 오든 것이 가능케 될 것을 예상하시고 구약의 성도들을 의롭다고 칭하셨다.

 

구약 시대의 신자들도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누리고 잇는 특권과 꼭 같은 것을 누릴 수 있었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구약 시대에는 회개와 믿음에 따르는 성령의 영원한 선물이 없었다. (요7:39). 또한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영생의 완전한 진리를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딤후1:10) 요컨대 저들은 저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불완전으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고 있었다. 기껏 해야 저들은 장차 임할 선한 것을 미리 맛보 는데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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