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속죄론 (贖罪論)

문성식 2021. 5. 9. 17:30


 

      론 (贖罪論)

 

 

II. 신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New Testament)


1. 속죄의 사실 (The Fact of the Atonement)

영원 전부터 예정되었고 또한 구약의 예배 의식 속에 모형적으로 예포되어 있는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갔을 대에 역사적으로 완성되었다. 곧 이 때에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이루워졌다. "다 이루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인용해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면밀하게 잘 기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적인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공의 빛나는 소망을 갖고 인생을 출발하였으나 자기도 예측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조차 없는 파멸로 이끄는 착잡한 환경 속에 빠지고 말았다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복음서의 증언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일부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아 그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신의 사명이지 결코 미리 예측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운명은 아니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메시야의 아들의 신분과 신성을 선언한 것이요 (시2:7) 둘째는, 주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의 사명을 선언하고 있다. (사42:1). 사42:1에 언급되어 있는 종은 이사야 53 장에 묘사되어 있는 고난은 그의 소명의 일부분임을 잘 의식하고 계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에 사탄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벌써 그는 안일하고 인기있는 길보다도 고난과 역경의 어려운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부터가 인간의 죄의 짐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죄악된 인간들과 한가지로 행도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사야 53장에 의할 것 같으면 주의종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행동은 우리들의 비참을 친히 담당코저 하는 사상의 위대한 행위하고 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는 죄인으로 헤아림으로 받았는데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의 속죄 사업은 시작되었다.

주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통해서 여러 번 그의 죽음이 닥아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비유를 들어서 암시하셨다. (마5:10-12,23:37,막9:12,13,3:20-30,3:6, 2:19).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는 고난을 받고 죽은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후로 그는 그의 제자들의 마음 속에 그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깊이 명심시켰다. 이와 같이 미리 경고하여 준 이유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갈 때에 그의 제자들의 믿음에 파탄을 가져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 이었다 (막8:31,9:31,10:32).

그는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을 뜻하지 않은 불행한 비극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대속의 목적을 지닌 죽음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에서였다. 인자는 많은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려고 세상에 왔던 것이다.


최후의 마찬시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으로 그의 공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기념해 주실 것을 당부하였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도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기념할만한 의식을 정하시었다.

그때까지 아직 메시야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유대교의 사고 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던 그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저들은 깨닫게 되었다. 그후부터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속죄의 수단으로 미리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증거하였다.


2. 속죄의 필요성 (The Necessity for Atonement)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속죄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성결과 인간의 죄악성이나,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성결의 반작용은 진노로써 나타났는데 이 진노를 막는데는 속죄의 수단이 요청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논할 요지는 성결과 죄악성과 진노와 속죄 등이다.


(a) 성 결 (Holiness)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성결하다. 즉 그는 인격면에서나 행위면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그의 인격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와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시33:5)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시89:14).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세계를 그의 일정한 법을 따라서 창조하셨다.그의 법은 인간의 인격의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그의 율법이 돌비에 새겨지기 전에 이미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었다. (롬2:14,15). 이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하여 주며 또한 인간의 책임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인류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성경 구절을 볼 것 같으면 죄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시키며 회개치 않는 죄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추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언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즉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로우신 분은 오직 의를 행하는 사람과 사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하나님과의 교제를 맺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한다. 처음서부터 끝가지 성경은 이 진리 즉 순종과 생명은 일치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창2:17,계22:14).


(b) 죄악성 (Sinfulness)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단절시킨다. 마치 부정이 부부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킨다 (렘3:20).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사59:2).

파괴된 율법을 다시 고치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속죄의 기능이다.


(c) 진 노 (Wrath)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성결에 대한 공격이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다. 사람이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게서 자기의 명예가 침해를 받도록 허용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는 그를 항거하는 자를 멸망시키기를 요청한다. 또한 그의 의는 유린된 육법을 회복하기를 요구한다. 또한 그의 성결은 죄에 대하여 반응을 이르키는데 이 반응을 가리켜 진노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의 반응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손을 불에 뎃을 때에 일어나는 반응과 같이 곧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진노는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격적 고려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으로 지은 것을 조급히 파멸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고하고 기다리면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의 인자하심이 인간들을 인도하여 회개시킬 것을 바라면서 그는 심판하시기를 더디하신다 (롬2:4,벧후3:9).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됨을 오해하고 심판에 대한 생각을 비웃는다."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8:11).

아무리 심판이 지연될지라도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은 법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음으로 반드시 최후의 심판은 있을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이와 같은 진리를 갈보리 언덕에서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동안에 지은 죄를 용서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이다." 또 이 구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역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대에 나타난 그의 정의의 계시에 비추어 하나님의 용서의 시대인 전 시대의 죄에 대한 심판을 중지하셨다. 이 때에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의 죄를 무죄로 선언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만방의 죄를 못본체 하는듯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하여 범죄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죄의 삯을 거두어 드리지 않는듯이 보였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것 이다.

하나님은 죄를 무시하고 있는가?

그러나 예수게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의 무서운 형벌이 제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도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어떤 학자의 글을 인용하면, "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그의 분노를 가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형벌을 내림으로써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극악한 형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결코 살아 남을 인종은 하나도 없었으리라.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다. 그런데 어떤 임금이 죄를 간과하여 형벌을 지연시킨다면 그는 불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잘못 해석하여 그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

스도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죽게 함으로써 그의 정의를 들어 냈다."


(d) 속 죄 (Atonement)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고 또한 義의 원리를 위반하고 말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는 사실이 인간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이 그 것을 죄로 증언하고 있다. 죄악된 과거를 속함 받고 미래의 확신을 얻게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가? 율법을 범한데 대한 속죄의 방도가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하여 세 가지 답을 줄수 있으리라.


1. 어떤 사람은 속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생이란 가혹한 법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 이 가혹한 법은 이 법을 범한 자에게는 기계적인 냉혹성을 갖고 벌한다. 사람은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죄는 영속하는 것이므로 죄인은 결코 과거로부터 피할 수 없다. 그의 미래는 그의 죄악 된 과거에 저당잡혀 있기 때문에 도저히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상을 나타내주는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

움직이는 손가락이 글을 쓰네.

자꾸 계속해서 움지이며 글을 쓰네.

너의 온갖 지혜와 동정으로 써 놓은 글을 한 줄이라도 지을 수 없네

너의 눈물로 단 한 자인들 씻어버릴 수 없네.

이와 같은 이론은 인간을 환경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에 하등의 영향력도 줄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드래도 자기 자신의 법칙에 제재를 받아 꼼짝 못하는 신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은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그 다음에 속죄는 필요없다고 가르치는 또 하나의 다른 극단론이 있다.

하나님은 너무나 인자하시기 때문에 죄인에게 벌을 주시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심이 깊기 때문에 범한 율법에 대한 배상을 요구치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는 필요치 않으며 용서함은 당연한 것으로 받게 된다. 어떤 의사가 그의 환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을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속죄 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고 말하면 충분합니다.." 얼마 후에 그 환자는 의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지금 나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다시 병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 하겠습니다." 동시에 그 환자는 치료비를 의사에게 줄 필요없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아마 여기서 의사는 독특히 교훈을 받았으리라. 곧 다시 말하면 단순한 회개만으로는 죄의 댓가를 지불할 수 없으며 또한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것을 변상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으리라.


3. 신약 성경은 속죄는 가능한 동시에 또한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속죄 가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은 의로운 동시에 또한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인자하신 동시에 의롭게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두 가지 그릇된 이론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두 가지 진리를 너무 과장한 것리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쩨의 이론은 하나님의 정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은혜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흘렀고 두 번째의 이론은 그의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정의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속죄는 하나님의 두 가지 품성에 다 타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의 은혜와 정의를 다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그의 은혜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면 그는 죄인이 죽는 것을 원치 않게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하는데 있어서 그는 정의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안전성은 하나님의 지배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품성에 타당한 공정성을 유지하였다. 그의 정의는 죄인의 형벌을 요구하나 그의 은혜는 죄인을 용서하는 길을 마련하였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품성에 타당한 공정성을 유지하였다. 죄를 경시하며 죄악의 비극적 실제를 무시해 가면서 죄인에게 동정심을 나타냈다면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의로서 공정성을 잃게 되고 만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갈보리 언더에서 죄의 댓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도 손상을 받지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의치 않으면도 은혜로울 수 있으며 무자비하지 않으면서도 의로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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