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포석정
포석정과 유상곡수
포석정(鮑石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경애왕이 물위에 술잔을 띄워 (流觴曲水 유상곡수)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다 견훤에게 기습당하여 최후를 마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역사의 모든 해석이 그러하지만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먼저 현재까지 알려진 이야기를 종합하면
1. 역사속의 포석정
생긴 모습이 전복 같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포석정은,
총길이 약22m,
폭: 30cm ,
입구와 출구의 높이차 : 약 6cm (평균 경사각도 : 0.2도) 로 거의 수평 구조로 되어 있다.
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을 정리하면
(1).삼국유사:
헌강왕이(876-886) 포석정에 가서 남산 神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곁에 있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이 보았다. 헌강왕이 봤다는 남산 신의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이라한다.
(2).삼국사기:
55대 경애왕(927)이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다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멸망.
(3)화랑세기 필사본:
포석사(鮑石祠) 즉 놀이하는 곳이 아닌 조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표시된다.
(4).동경통지(東京通志): 경주 지방의 풍속과 지리 기록
포석정이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라는 두 절 사이에 있다
2.포석亭이냐 포석祠이냐
전복 보다는 나뭇잎 새 또는 포주박 같은 형상인 이곳이 놀이를 위한 亭이냐 아니면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냐를 두고 말들이 많다. 전자는 역사서의 기록에 의존하고 후자는 상황이나 주변의 분위기에 의존한다.
즉 일부에서 그 해 9월에 턱밑 영천까지 진출한 견훤의 군대를 눈앞에 두고 놀이에 빠진다는 것과, 더군다나 음력11월(양력12~1월쯤)이면 겨울인데 시기적으로 야외놀이에는 부적당하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조상神들께
호국을 위한 제사목적이 아니었을까 라는 반문이 있다.
물론 경주와 가까운 곳이니 겨울철이라 하여도 날씨가 따뜻하면 놀이를 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3. 나의 상상속의 추론
일단 유상곡수라 두고 풀어보자. 사실 현재의 모습도 긴 과거의 시간 속에 原型이 보존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일제가 보수를 하면서 훼손을 하였을 수도 있다.
유체역학적인 측면에서 과연 술잔이 흘러가는 현상이 가능한 것 인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별로 없다.
누군가가 전산 Simulation 해석을 한 것이 있는데,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서 구체적인 것은 확인 할 길이 없고
개요에서는 곳곳에 맴돌이( 渦流 :Vortex) 등으로 한 바퀴 흐르는데 제약 조건이 많지만 대략 8~10분 정도로
시간이 소요되어 詩 한수 지을 시간은 된다는 결론으로 나와 있다.
문제는 유속을 정하는 방법인데 사진에서 보듯이 상류에서 연속적인 물의 공급은 불가능하고, 출구 쪽에도 유속이나 유량을 제어하는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경사가 완만한 이런 구조에는 반드시 출구 쪽의 조정용 Gate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술잔이 고요히 물길을 따라 천천히 흐른다.
만약 입구 쪽에서 연속적으로 물을 흘러 보내고 유량으로 흐름을 통제한다면 流速이 빠르고 亂流가 되어 술잔이 뒤집히거나 와류가 형성되면 한 곳에 멈출 가능성도 있다.
그럼 실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몇 명이나 참석이 가능 할까?.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첫째 포석정 流路 주변에 앉아서 술잔을 돌리는 경우와 약간 높은 좌대를 마련하여 좀 떨어진 곳에서 내려다보며 즐기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총 길이가 20m이니깐 1m당 1명씩 최소한 20명, 안쪽 까지 앉는다면 많게는 40명 가까이 앉을
수는 있다.
그러나 술이 있는 곳에는 歌舞가 필수이고 지필묵이 있어야 하니깐, 이런 공간을 생각한다면 유희에 참석하는
인원은 보조원을 제외하고 최대 10여명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후자의 경우는 2배 정도는 되질 않을까?
현실적으로 술잔이 흘러 갈 것인가?.
신라 시대에는 비교적 높은 도수를 만들 수 있는 증류방식은 아직 개발이 안 된 상태이고 발효주가 전부 일
것이니, 지금의 막걸리나 청주 정도의 酒度를 가진 술일 것이다. 술기운을 느낄 정도가 되려면 술잔의 크기는
현재의 막걸리 술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의 술잔의 재질은 토기, 유리, 청동, 박 및 나무 정도이다. 토기와 유리는 무겁고 부딪히면 파손되니 불가능 할 것 같고, 박은 고급스러움이 없으니 청동이나 나무잔이 적당할 것 같다
술잔을 어떻게 배분하나?
한 바퀴 돌 동안에 詩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신다는 놀이에 비추어 볼 때 또 ,한번 통과 시간이 8분 정도로 보면 참석 인원이 10명으로 가정 하더라고 one Turn에 1~2시간이 걸려 지루 할 것이니, 2~3분 간격으로 연속적으로 잔을 흘러 보낼 것이다. 아니면 원형 테이블에 술잔을 얹혀놓고 돌리면서 먹는 중국식처럼 잔을 계속 흘러 보내 자기 앞에 오는 잔을 들어 마시든지..,
기록상 이곳이 언제 무슨 목적으로 건설 되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나의 느낌은 소위 회식을 위한 놀이용으로만 생각하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그 이유는 야외 풍류 장소로는 너무 협소하고,
둘째로 주변은 왕릉과 사찰이 많고 남산은 당대의 경주시민들에겐 聖山인데 ,안압지나 타 장소를 놔두고 그곳에서 음주 가무를 즐겼다는 점에서 그렇다 .
아직 까지 풀어야 할 숙제는 많지만 석조 조각 솜씨나 나뭇잎 새 같은 조형적인 美는 일품이다. 물의 공급과 排水 방법에 대한 유물이 분실되어서 아쉬움이 많지만, 이런 의문을 해소할 유물이 출토되길 기대하며 한편으로는 적당한 미스터리를 갖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관심을 갖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주)
1. 流觴曲水 (유상곡수)의 유래
자구 해석을 하면 “굽이도는 물에 흘러가는 술잔” 정도의 의미인 유상곡수는
왕희지가 (서기 353년)에 처음 시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 중국에는 현재 명나라(1548년)때 중건한 것이
절강성에 남아 있고
일본서기(日本書記)는 485년에 곡수연(曲水宴) 개최 기록이 있고 신사(神社)나 정원 그리고 궁 같은 곳에
노천 개방형의 곡수 유적이 여러 개 남아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동양3국은 曲水란 유사한 문화를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목적이 유희냐 아니면 儀式에 사용한 것이냐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2. 멸망에 대한 三國史記의 기록
13세기 고려시대에 기록된 삼국사기는 신라와 백제의 최후의 멸망순간을 공통적으로 酒色과 풍류 때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망해가는 과정에서는 영향을 주었겠지만, 눈앞의 전투를 앞두고 환락에만 빠졌다는 것은 좀
과장이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구려도 연개소문의 괴팍한 성격에 맞추는것도
그러하다.
다지고 보면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强者의 것이니깐...
그럴수 밖에
<출처;blog.joins.media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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