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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문성식 2011. 1. 23. 19:47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세로 23센티미터, 가로 108센티미터의 족자 형식을 빌려 그린 문인화이다. 긴 화면에 단지 쓰러져 가는 오막집과 그 좌우에 소나무· 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을 뿐, 여백의 텅 빈 화면을 보노라면 한 겨울 추위가 매섭게 전해져 뼛속까지 시리다. 화면 오른쪽에는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란 관지(款識)에 정희(正喜)·완당(阮堂)이라고 새긴 낙관이 찍혀 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용비늘이 덮인 노송과 가지만이 앙상한 늙은 잣나무를 통해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가 담백하고도 고담(古淡)한 필선과 먹빛으로 한지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한도는 지극히 절제되고 생략된 화면에서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선비의 고졸(高拙)한 정신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병제(竝題)에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 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고 했듯이 황량한 세상에 지조 높은 선비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귀양살이하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 간의 끈끈한 사제(師弟)의 정이 흠뻑 배어 있는데, 문인화의 인위적인 기교를 훌훌 털어 버려 선비의 맑은 문기(文氣)가 넘쳐흐른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며 서화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추사(秋史)이다. 증조부되는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영조의 첫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해 열 셋에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부마(駙馬)가 된 월성위는 예산 오석산 근처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의 '추사고택(秋史古宅)'이 바로 그 집이다.
김정희는 증조 할머니가 옹주였으니 집안의 범절이나 내력이야 더 할 나위 없는 명문가의 자손이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어서는 청나라를 왕래하며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등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금석문(金石文)의 감식법과 서법(書法)을 익혔다.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완당(阮堂)'은 당시 옹방강에게서 '해동 제일의 문장'이란 칭찬과 함께 지어 받은 것이다. 또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도 힘써 신라 진흥왕이 세운 북한산 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는 쾌거도 올렸다.

1819년,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예조 참의, 병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면서 순탄한 벼슬길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부친이 비인 현감(현재 충남 서천 소재)을 지내면서 김우영을 파직시켰는데, 그 일로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김정희는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갔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자, 1840년 제주도 정포(靜浦)에 또다시 유배, 안치되었다. 아버지인 김노경은 그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김정희는 영의정이며 친구였던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은 모면했으나 제주도 서쪽 백 리 거리의 외딴 집에서 8년간이나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 세월 동안 김정희는 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만 정진해서 마침내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어냈다.

이처럼 절대 고독과 맞대면해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정희에게 마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일까? 거센 바람과 무서운 파도가 돛단배를 집어삼킬 듯한 험난한 뱃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주도를 찾아와 준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와 역관(譯官) 이상적이었다.
세한도를 낳게 한 이상적은 김정희의 문인으로 만학(晩學)과 대운(大雲)이란 책을 중국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 주었다. 그 당시의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 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내 준다는 것은 여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여 두 번이나 책을 보내 주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냉랭한 세태에서 선비다운 지조와 의리를 훌륭히 지켜내었다. 김정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세한도를 그려 인편을 통해 보내 주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송백(松栢)에 비유해 칭찬하고, 이어서 마음을 담은 발문(跋文)을 특유의 추사체(秋史體)로 써 그림 끝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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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책을 보내주더니, 금년에 또 우경(藕耕)과 문편(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 책은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닌데 천만 리 먼 곳에서 여러 해를 거쳐 사서 나에게 얻어 보게 했으니 한때의 일이 아니다. 세상 인심은 도도(滔滔)하여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데, 마음과 힘을 허비하면서 권세와 이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내 바다를 건너 초췌하고 여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세상에서 권세와 이익을 좇는 것을 일컬어 태사공[司馬遷]은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을 함께 갖은 사람이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제가 소원해진다'하였다. 그대도 역시 도도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인데, 스스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 밖으로 빠져나와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으니,(그렇다면)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송백이 사계절이 없이 시들지 않고 날씨가 차가워지기 전에도 송백이요, 차가워 진 후에도 송백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특히 날씨가 차가워진 후를 칭송하였다. 그대가 나와 함께 있을 적에 그대를 위해 잘해 준 것도 없고, 뒤(유배시)에도 덜 생각해 준 것도 없다. 그런 연유로 전(권세가 있을 때)에 그대를 칭찬한 적이 없는데, 그대는 훗날 성인의 칭찬을 받으려 한 것인가. 성인이 특히 칭송하기를 시들지 않는 정조와 굳은 절개뿐만 아니라 날씨가 추워진 때가 되어야 송백의 정조와 절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한나라 서경[洛陽]에 순박하고 후덕한 인심이 있었을 적엔 급암(汲 )과 정당시(鄭當時)같은 어진 사람도 그 빈객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으며, 하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문(榜文)을 붙인 일은 세상 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한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김정희는 헌종 말년(1848)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친구인 권인돈(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66세 노인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2년만에 풀려났다. 그 후로는 안동 김씨의 계속된 세도 때문에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김정희는 부친의 묘가 있던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더욱 몰두하더니 71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현재 그의 묘는 추사 고택 왼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묘 앞쪽에는 밑동에서 세 줄기가 올라와 비스듬히 구부러진 반송이 서 있는데, 혼탁한 세태에 김정희의 예술 정신을 청아하게 일깨우는 듯 하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그 후 북경으로 가 그곳의 학자들에게 두루 이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장악진(章岳鎭)·조진조(趙振祚)등 16명의 명사들은 앞을 다투어 그림을 칭찬하는 찬시(贊詩)를 지어 그림 끝에 붙였고, 그 후 김정희의 문하생이던 김석준(金奭準)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그림에 대한 감상문) 등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두루마리 형태로 완성되었다.

국보를 찾아왔노라
이상적이 소장해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가 어떻게 그 후 일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고졸한 문향을 뽐내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의 손에 세한도가 들어 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지즈카는 북경의 한 골동상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살았다. 그리고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 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한 논문은 「淸朝文化東傳의 硏究(청조문화동전의 연구)」(원제: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거세 지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의 끊질 긴 노력에 의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겼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그 사람이다. 세한도가 후지즈카의 수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재형은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아니라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그림을 양보해 달라고 매달렸다.

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 수장가요, 대 감식가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골동사에 굵은 필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 미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에 소재한 멋들어진 한옥 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던 풍류객이었다. 재기가 발랄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손재형은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해 서화뿐만 아니라 전각과 유품까지 열성적으로 수집하였다.

일제 때,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만은 눈여겨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겸재(謙齋)의 화첩까지 양가 댁의 불쏘시개로 쓰이기 예사였고,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대가의 그림도 벽지로 둔갑한 채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어 버렸다. 어두웠던 시절, 조상의 예술 혼과 기상이 신광을 찌르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우리의 자긍심을 부추 키는데는 그 시대, 몇 안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손재형의 집념은 민족문화재수호의 귀감이기도 하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찾아 동경으로 달려갔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어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死地)였다. 손재형은 물어 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내고는,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이만 저만이 아님을 잘 아는 손재형인지라 장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배짱 하나로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즈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 문안을 했다.

말이 병 문안이지 사실은 세한도를 문안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찾아온 목적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매일 눈만 뜨면 찾아가 인사를 하기를 일주일, 수상히 여긴 후지즈카가 드디어 목적을 물었다.
"어쩐 일로 매일 찾아오는 거요?"
기회를 엿보던 손재형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무겁게 털어놓았다. 얼굴에는 비장한 의지가 감돌았다.
"세한도를 양보해 주십시오."
"뭐요? 그 그림은 내가 정당하게 입수한 물건이요. 당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오. 당장 나가시오."
노기가 가득 찬 얼굴로 후지즈카가 일어나 앉았다. 눈빛에는 추호의 양도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재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손재형은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그 집을 나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스럽게 들리고 거리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손재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지독한 상황까지도 각오한 그였다. 당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찾아가 세한도를 양도해 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백 여일 가까이,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손재형의 열성에 후지즈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소. 하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을 하겠소."
긴장한 손재형을 후지즈카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거든 그림을 당신에게 보내 주라고 하리라.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 주시오."
드디어 희망의 빛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동경의 전세는 날이 다르게 험악해져 갔다. 그 와중에 세한도가 온전히 살아 남을 지 의심스러웠다. 한번 물러서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이 몰려왔다.
"후지즈카 상, 기왕에 넘겨주시기로 결심했다면 당장 넘겨주시지요."
그러자 후지즈카는 단호하고도 매정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림없는 말,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물러가시오."
손재형은 다시 후지즈카의 집을 물러 나왔다. 그는 마지막 조율을 가다듬은 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후지즈카에게 문전 축객을 당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 생각하고, 10여 일을 계속해서 찾아갔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굳게 닫혔던 후지즈카의 집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당신의 열성에 내가 졌소. 가져가시오."

김정희의 혼이 배인 명품이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손재형이 얼마의 돈을 주고 후지즈카에게서 세한도를 입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만약에 그때 세한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랑스런 국보 한 점을 영원히 잃을 뻔하였다. 후지즈카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재형은 그 즉시 오세창에게로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오세창은 즉석에서 배관기를 써 주었다.
"전화(戰禍)를 무릅쓰고 사지(死地)에 들어 가 우리의 국보를 찾아 왔노라."

바람처럼 옮아간 세한도
그러나,
세상 물건에는 모두가 때에 따라 주인이 있는 법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 끝에 되 찾아온 세한도도 그후 너무나 어이 없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을 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손재형은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조직해 초대 회장이 되더니, 1947년에는 진도 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 대 후반부터는 정치에 투신해 일약 정치가로 활약했다.

1958년 민의원 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 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화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케 할만큼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하나 둘씩 저당 잡히며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이다.
개성 사람, 이근태(李根泰). 그는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개성 상인으로 가회동에서 살았다. 하루는 손재형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세한도를 비롯한 고서화가 한 뭉치나 들려 있었다.

이근태는 손재형이 워낙 재력가로 소문나고 또 들고 온 고서화 모두가 국보급 미술품이라 남의 돈을 빌려다 주면서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함께 저당 잡힌 고서화는 단원(檀園)의 군선도(群仙圖), 겸재(謙齋)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등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들이다.
그런데 손재형은 첫 달부터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집착했던 그에게 권력은 그토록 달콤했던가? 이근태는 몇 달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꾸었다. 하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붙기 식이었다. 몇 번이고 손재형을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으나 워낙 바쁜 의원님이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다 남의 이자 돈을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살던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의 작품과 정선· 심사정· 대원군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하지만 그 그림들 역시 남의 이자 돈을 막는 볼모로 모두 팔려 나갔다. 그러나 정작 손재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세한도는 결국 개성 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수장하고 있다. 이상적에 이어 후지즈카를 거쳐 손재형, 손세기로 바람처럼 옮아다닌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일,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국보 제 180호로 지정 받았다.



ㅡ 세모가 되니 '세한도' 생각이 나서 웹 사이트 몇 곳에서 글과 그림을 옮겨와 편집해봤습니다.(鶴軒)

출처 :Joyful의 뜰 원문보기   글쓴이 :Joy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