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2. 한국 교회의 성장(1953~1962년)

문성식 2019. 2. 16. 21:27


2. 한국 교회의 성장(1953~1962년)


2-1. 남한 교회의 전쟁 극복

 

1953년 휴전으로 남북한 교회의 분단은 기정 사실로 굳어졌다. 휴전으로 사회가 점차 안정되자 남한의 교회는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선교 활동을 재개해 나갔다. 전쟁으로 발생한 인적 손실은 외국의 선교사와 수도회의 지원으로 보완해 갔다. 외국 교회의 지원은 교회가 입은 물질적 손실을 복구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미국의 가톨릭 구제회(NCWC)와 독일의 미제레올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부인회 등에서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큰 도움을 주었다.
휴전 직후 남한 교회는 매우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하는데, 1953년 당시 남한의 신자 수는 대략 17만 명 정도였다. 휴전 이후 1950년대의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16.61%에 이르렀다. 특히 1958년의 경우에는 전년도에 비하여 24.18%포인트의 신자 증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이르러 신자 수는 5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다음 해에 신자 수 50만 명을 돌파한다. 당시 교세 증가 현황은 다음 <표 6>에서 확인할 수 있다.

휴전 이후 한국 교회는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교구가 증설된다. 지목구이던 춘천이 1955년에 교구[代牧區]로 발전하였으며, 1957년에는 광주교구, 전주교구, 부산교구가 설정되었다. 이어서 1958년 대전교구가 설정되어 해방 직전 일본 식민지 정권의 강요로 은퇴를 강요당한 파리 외방 선교회 선교사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정식으로 교구장에 취임하였다. 청주교구(1958년)와 인천교구(1961년)도 설정되어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이 두 교구를 관장한다.
1950년대 한국 교회 발전에는 수도회가 크게 기여하였다. 극심한 전란의 피해를 입은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는 경상북도 왜관에 재정착하였으며(1952년),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도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예수회가 진출하여 서울에 서강 대학교를 개교하였다(1960년). 그 밖의 몇몇 남자 수도회들이 새롭게 창설되거나 한국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여자 수도회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한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전란의 과정에서 혹심한 시련을 당했지만, 전후 한국 사회에서 다시 자리를 잡았으며, 가르멜 수녀회도 관상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함흥교구와 연길교구에서 선교하던 성 베네딕도회 수족의 수녀회들도 남한 사회에 재정착하여 선교에 종사하게 된다. 평양교구 소속 수녀회이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서울에 정착하였고, 한국 순교 복자회, 서울 성가 소비녀회,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 등 방인 수녀회도 자리를 잡아 나갔다. 이 시기에 여러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였으며 곧 한국 사회와 교회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다.
1950년대 한국 교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각종 신심 단체와 사도직 단체들의 봉사와 활동을 주목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단체로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레지오 마리애'의 한국 진출을 들 수 있다. 1953년 전라남도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출발한 레지오 마리애는, 개인 신심 위주의 이전 단체들과는 달리 선교와 교회 활동에 대한 신자들의 참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또한 교회는 극심한 빈곤을 극복하기 위하여 신용 조합 운동을 시작하였다. 1952년 부산 메리놀 병원에서 시작된 이 협동 운동을 통해 신자들의 자립 의지는 강화되어 갔다. 이때의 신용 협동 조합은 오늘에 이르러 일반 대중의 민주적·재정적 협동 기관으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전쟁 미망인이나 실업자를 위한 각종 직업 보도 교육도 당시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진행하던 사업이었다.

<표 6> 현대 한국 교회 현황(1945~1962년)

연도 신자 수 전년대비
증가율
(%)
본당수 성직자 수사 수녀 신학생
한국인 외국인 한국인 외국인 한국인 외국인
1944 179,114 (-2.26) 163 134 107 13 44 332 50 ? ?
1949 157,668 (-12.28) 131 146 60 ? ? 385 16 106 78
1954 189,412 13.78 142 190 61 ? ? 489 30 ? ?
1955 215,554 13.80 152 197 91 ? ? 650 53 ? ?
1960 451,880 8.34 258 246 202 66 57 721 111 449 267
1962 530,227 7.67 275 296 250 55 43 1,099 135 360 314



2-2. 교회와 정치 권력

 

휴전을 계기로 교회의 재건 작업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교회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교회 탄압은 야당 견제 작업과 일정한 관련이 있었으니, 자유당 정권은 야당 지도자이며 천주교 신자인 장면(張勉, 1899~1966년)과 천주교회를 하나로 파악하여 탄압하였다. 또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 이승만은 법무부 장관을 바티칸에 파견하여 노기남 주교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에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방한한 교황청 포교성성 차관 아가지아니안(Agagianian Gregorio Pietro xv)은 서울교구장의 행동에 결점이 없음을 확인하고 귀환하였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1959년 서울교구에서 간행하는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으나, 국내외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폐간을 철회하고 무기 정간 처분을 하였다.
이러한 이승만 독재 체제는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으로 극복되었다. 4·19 혁명 이후 7·29 총선거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투표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한편, 천주교 입후보자의 면모를 교회 언론 기관을 통해 신자들에게 알리고 이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 결과 10명의 신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이를 축하하면서,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은 “마땅히 모든 선량의 판단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격려하였다. 또한 장면이 국무총리에 선출되자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를 비롯하여 교회 인사들은 이 일이 ‘전국 교우들의 자랑'임을 확인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세 번째로 가톨릭 신자 행정 수반이 탄생한 사실을 축하하는 등, 장면 정권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면서, 서울교구의 김철규(金哲圭) 신부 등은 민주당 정권의 주요 배후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교회는 민주당 정권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권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동안 교회의 견해를 한국 역사 현장에 적용하여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로 한국 교회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5·16 쿠데타 직후 교회는 합법적 정권에 대한 지지와 쿠데타에 대한 저항을 동시에 포기하였다. 오히려 교회는 장면 내각을 무너뜨린 군사 쿠데타 세력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고, 쿠데타 세력은 자신의 정권 장악을 기정 사실화하고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교회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한 교황 사절은 쿠데타 세력이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데 특별한 호감을 표현하고, 미국에 앞서서 쿠데타 세력을 인정하였다. 이는 쿠데타 세력에게서 한국 교회가 배격되거나 탄압받는 것을 막기 위한 사전 조처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