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제3부 한국 교회와 현대 사회(1945-1999년)

문성식 2019. 2. 16. 21:23


제3부 한국 교회와 현대 사회(1945-1999년)

 


1. 분단 시대 출현과 교회(1945~1953년)

 

1-1. 해방 공간의 교회

 

해방은 한국사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현대의 기점이 된다. 한국이 해방된 8월 15일은 바로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이에 한국 교회는 해방을 성모 마리아의 선물로 해석하고 해방의 기쁨에 동참하여, 민족의 해방과 세계 평화의 회복에 감사하는 미사를 전국 성당에서 집전하는가 하면 적지 않은 성당에서 특별 행사를 열었다. 이와 함께 선교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당시 한국 교회에는 5개의 교구(대목구)와 3개의 지목구, 1개의 수도원 교구(면속구)가 있었고, 신자 수는 대략 18만여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남한에는 서울교구, 대구교구, 전주지목구, 광주지목구, 춘천지목구 산하에 약 11만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북한에는 평양교구, 함흥교구와 덕원수도원교구에 약 5만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만주의 연길교구에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 신자들 외에도 300여 명의 내외국인 성직자와 400명 남짓한 수녀들이 있었다.
1945년 9월에는 미국 군대가 남한에 상륙하였다. 남한 교회에서는 이들을 환영하면서 선교의 방향을 찾고 있었다. 한편 이에 앞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도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들이 진주한 북한 지역 교회에서도 해방의 기쁨은 마찬가지로 컸다. 북한 지역 교회도 해방 축하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해방을 교회 발전의 새로운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남북한 교회는 이와 같이 모두 해방의 기쁨에 동참하였으나, 본의 아니게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을 묵인하거나 협조한 과거에 대해서 겸허하게 반성하지는 아니하였다. 이로써 해방 공간의 종교 신앙인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보류한 채, 해방의 감격에 젖어 있었다.
당시 남북한의 인구 규모를 감안할 때 천주교 신자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0.72%정도였다. 해방을 전후하여 사회 지도층에 있는 신자도 극히 적었다.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각종 교육 기관이나 사회 복지 기관도 소수였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식민지 사회와 해방 공간에서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당시 천주교는 객관적으로 볼 때 다른 종교 집단이나 사회 단체와는 달리 그 친일 행위에 대한 책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하였다. 그러나 친일은 민족적 양심에 관한 문제였다. 인간 양심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면 해방의 시점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해야 하였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 한국의 분단이 고착화하는 과정에서 교회도 분단의 피해를 받는다. 북한 지역 교구들은 소련군의 후견을 받는 공산주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서울교구의 일부이던 황해도 지방도 북한 지역으로 편입되었는데, 1948년 분단 정권이 성립되기 전까지는 서울교구의 관할권이 미치고 있었다. 북한 지역에서도 해방 직후 활발한 종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평양교구에서는 신자들의 노력으로 대성당을 건설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의 종교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북한 교회는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1948년 분단 정권이 성립되고 전쟁이 준비되던 과정에서 북한 교회의 활동은 탄압을 받았다. 그리하여 1950년 한국 전쟁 직전까지 북한 지역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체포되었으며, 교회는 폐쇄되었고 수도원은 해산되었다.
한편 만주 북간도 지방에 있는 연길교구는 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만주국'(滿洲國)이 소멸된 뒤, 이 지역에 대한 중화민국의 주권이 회복되었다. 중국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1946년 로마 교황청에서는 중국에 정식 교계 제도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연길교구를 조선 교회에서 분리하여 중국 교회로 이관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범위에서 연길교구가 제외되었다.
해방 직후 서울교구의 노기남 주교는 세계 평화 회복에 감사하고 우리나라에 건전한 정부가 하루빨리 수립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전체 신자들에게 요청하였다(1945.8.17.).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과 함께 스펠만(Spellman, 1889~1967년) 대주교가 입경하여 전쟁과 탄압에 시달리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로하고(1945.9.8.), 곧이어 연합군 환영 미사와 환영식이 명동 성당에서 거행되었다(1945.9.28.). 해방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환영회'가 명동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상해 임시 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이 환영식에서 김구(金九)는 중국의 천주교회가 한국의 독립을 후원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당시 남한의 미 군정에서는 임시 정부의 법통을 부인하고 있었다. 이때 천주교회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환영회'를 개최한 것은 독립 유공자인 임시 정부와 그 주요 인물들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환영회를 개최함으로써 임시 정부의 법통을 인정하는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해방 공간의 남한 교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인 성직자들의 선교 활동이 활기를 띠었고, 조선에서 선교하던 일부 일본인 사제들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대구교구의 경우 1946년 초에 일본인 교구장이 서거하자 제4대 교구장으로 주재용(朱在用, 1894~1975년) 신부가 임명되었다. 일제 말엽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복역하고 있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 3인이 석방되었고, 강원도 홍천과 충청도 공주 등지에 연금된 선교사들이 석방되어 자신의 선교지로 돌아갔다. 추방되었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도 다시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해방 공간 한국 교회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다. 로마 교황청은 해방 직후의 한국 교회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다. 교황청은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부터 서울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였으며, 남한이 독립할 때 이를 최초로 승인한 국가가 되었다.

1-2. 분단 정권하의 교회

해방 직후 남한 사회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천주교 지도층은 반공주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들이 견지한 반공주의는 남한의 건국 과정에도 투영되어, 남한에 성립된 분단 정권의 성격을 반공주의로 정립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포되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염원하는 독립 국가의 수립이었다. 교황 비오 12세도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축전을 보내 왔다. 그러나 북한 교회와 신자들은 공산 정권 성립에 정서적으로나마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에서는 조선 민주당이 민족주의 정당으로 조직되었다. 이 정당은 창설 초기에는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 노동당에 대항하며 활동하였다. 이 상황에서 북한 지역의 유력한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 민주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인민 정권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주류를 점하면서, 친교회 인사들은 새로운 정권 창출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1-3. 한국 전쟁과 교회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남북한 교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전쟁 때문에 북한 지역 교회 활동은 거의 정지되었다. 북한 교회의 활동이 본격적 타격을 받기 시작한 때는 1949년 이후부터이다. 이 해에 평양교구의 홍용호 주교가 체포되었고, 함경남도 덕원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사우어(Sauer, O.S.B., 신 보니파시오, 1877~1950년) 주교도 이때 체포되어 뒷날 옥사하였다. 이 밖에도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성직자들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24일까지 거의 모두가 체포되거나 전쟁 중에 살해되거나 행방 불명되었다. 대부분의 성당과 교회 기관은 폐쇄되었다. 전쟁에 앞서 1949년에는 베네딕도 수도원이, 1950년에는 평양에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해산되었다.
한국 전쟁은 대구교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교회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남한에 있던 교회 건물 상당수가 전화를 입어, 해방 이후 활발히 전개되던 교회 사업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전쟁 기간에 학교는 정상적으로 문을 열 수가 없었으며, 출판물도 간행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전쟁 기간에 적지 않은 인적 손실을 입었으니, 성직자, 수도자, 지도급 신자들의 피랍과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가해는 전쟁 초기부터 인민 정권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전쟁을 전후한 기간에 체포되어 피살되거나 행방 불명된 한국인 성직자는 40명에 달하는데, 당시 한국인 성직자 144명 중 27.8%에 이르는 비율이다. 또한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가 거의 체포되었는데 그 숫자는 153명으로, 이들 가운데 96명은 전쟁이 끝난 다음 생환하였다. 그러나 28명이 수감 중에 옥사했으며, 17명은 피살되고, 12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피살자, 옥사자, 행방불명자가 57명에 이르러 체포된 외국인 선교사와 성직자 가운데 37.3%에 이르렀다. 한편 공산군이 점령한 지역의 평신도 지도자들도 연행되거나 피살되었다. 경기도 오산에서는 교회 기관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의 전쟁 고아들이 UN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일시에 50여 명이 죽기까지 하였다. 전쟁에 따른 이와 같은 인명 피해는 당시 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심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