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 - 제4절 교리 문답 - 공(空), 중관(中觀), 팔부중도(八不中道)

문성식 2016. 11. 2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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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
      제4절 교리 문답
        [공(空)] 공사상은 우주의 실상인가, 허무주의인가? 공은 비어 있음, 무(無)ㆍ공적(空寂)ㆍ공정(空淨)이라고 번역한다. 허무나 멸무(滅無)와는 다른 실상(實相)의 의미이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 불변하는 자성이 없다.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아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다. 공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하여 현정(顯正)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가지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원시불교 경전에서는 존재를 5온ㆍ12처ㆍ18계 등으로 분석함으로써 아(我)의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공과 연기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 부파불교에 오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성실론(成實論)에서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한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은 원시불교의 연기관과 부파불교의 공관을 총합하여 일체제법이 공이라고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을 설한다.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하여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 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이러한 교설은 대립적인 상대 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인연에 따라 생겨지는 현상을 공이라 하고, 또한 이것을 가명(假名)이라 하고, 또 이것을 중도라고 칭한다. 일찍이 하나의 현상도 인연에 따르지 않고 생한 것은 없으니, 이런 고로 일체 현상은 공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무(絶對無)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공은 허무가 아니고,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한 가치의 발견이므로,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중관(中觀)]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편벽되고 삿된 미망을 여읜 법의 실리, 곧 절대 이성을 관함을 말한다. 삼론종에서는 제법이 불생불멸하며 무거무래(無去無來)한 것이라 관하는 것을 중관이라 하고, 천태종에서는 삼천(三千)의 제법(諸法)은 낱낱이 모두 절대(絶對)라고 관하는 것을 중관이라 한다. 중관학파는 인도의 대승불교를 지탱해 온 교학 체계에 있어서 유가행파와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상가는 용수와 그의 제자 아리야제바이다. 용수의 공사상은 완전한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모든 것은 공임을 자각하는 데서 그 방법을 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인 동시에 실천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것을 막론하고 먼저 자기에게 부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다시 그런 부정적 대립자를 부정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내가 없다는 사실이 먼저 전제되고, 그 없다는 사실이 부정됨으로써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있다는 그 사실이 부정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공의 이치는 상호간에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의 어는 한쪽에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또한 중도라고 한다. 따라서 중관 사상은 대상을 인식할 때 집착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편견과 사견, 즉 분별심을 세척하여 올바른 진리관을 정립해 주는 사상으로 엄밀히 말하면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용수의 학파를 중관학파라고 하는 이유는 그의 저서인 『중론』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고, 『중론』외에 『십이문론』과 제자인 데바의 저서 『백론』을 합해 삼론이라 하여 중국 삼론종에서는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팔부중도(八不中道)] 중도의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팔불중관(八不中觀), 팔불정관(八不正觀), 무애중도(無碍中道), 무득중도(無得中道)라고도 한다. 즉 중생들은 일체 존재를 잘못 알고 생(生)ㆍ멸(滅)ㆍ거(去)ㆍ래(來)ㆍ일(一)ㆍ이(異)ㆍ단(斷)ㆍ상(常)이라는 그릇된 고집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일체 현상이 모두 자성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 불생ㆍ불멸ㆍ불거ㆍ불래ㆍ불일ㆍ불이ㆍ부단ㆍ불상의 팔불(八不)의 정관을 닦는 것을 말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법의 생은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 되어 사라지는 것뿐이다. 이는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생멸에 대한 착각과 집착하는 것을 고쳐 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불상부단(不常不斷)이란 모든 법은 인연의 집합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데, 영원히 상주한다거나 단멸한다고 착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타파한 것이다. 셋째, 불이불이(不一不異)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기에, 영원히 다르다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을 부정한 것이다. 넷째, 불거불래(不去不來)는 일체 중생이 무명 망상으로 윤회하여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가는 체성이 아닌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한 것이다. 이 같은 팔불의 중관 사상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기치로 한 것이니, 팔불로써 집착을 타파하여 공임을 보인 것이 파사요, 그리하여 중도를 드러낸 것이 현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