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제2절 불교의 핵심교리
4. 사성제
3) 괴로움의 소멸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
즉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 또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진
평온의 경지를 나타낸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었으니 괴로움도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
이는 이미 중생의 삶이 아니라 열반과 해탈을 성취한 성자의 삶이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병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여 병을 모두 치료했으니
이제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고통스러운 병과 그 원인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삼법인에서 언급한 열반적정의 상태이며,
이 장의 마지막에서 살펴 볼 12연기의 역관(逆觀)의 결과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모든 존재현상은 끊임없이 생멸하고[無常],
생멸, 변화하는 현상들은 갈등과 갈애의 상태를 면치 못하며[苦],
이런 생멸하는 갈등과 갈애의 현상 이면에는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無我]’라는 진리를
확실히 체험하면 바로 그 상태가 열반적정인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존재현상의 시작과 끝을 여실히 관찰하여 체득함으로써
해탈열반의 세계를 성취하게 된다.
즉 괴로운 존재현상을 떠나
어떤 열반적정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열반적정이며 해탈이고,
잘못 보면 괴로움이고 번뇌이고 무명(無明)이다.
여기에 멸성제의 현실적이고도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고뇌와 무지로 점철된 삶의 질곡이 따로 있고
해탈열반의 이상세계는 저 멀리 존재한다면
고통의 삶을 극복하기 위한 수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너그러운 자비심과 공경으로 대하고,
좋은 말, 밝은 얼굴로 내 욕심을 접고 먼저 양보하며
남의 일을 같이 기뻐하고 상처를 안아주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모든 공덕을 함께 나누면,
바로 그 순간 괴롭고 힘든 고통의 삶이
지금 여기에서 신나고 기쁨이 넘치는 수행의 삶으로 전환된다.
멸성제의 현실적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다음에 살펴볼 도성제(道聖諦) 즉, 8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다.
4)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 팔정도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 즉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또는 8가지 수행방법[八正道]을 말한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팔정도는 불교의 종합수행법이며, 불교수행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유구한 세월을 통해 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계발되고 계승된
불교의 각종 수행법의 토대가 된다.
팔정도의 수행덕목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수행의 핵심 사항들이 종합적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팔정도의 각 덕목들은 정견을 얼마나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수행 결과가 달라진다.
또한 팔정도 수행의 출발점은 정념이고 그 노력이 정정진이며
이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집중에너지가 형성되면 정정,
행동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정어, 정업, 정명이다.
다음에서 팔정도의 덕목들을 알아보자.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이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 또는 ‘바른 견해’라는 뜻으로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정견은 사성제를 위시한 삼법인, 12연기설과 같은 불교의 핵심교리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하여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정견은 모든 불교수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정견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수행의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 바로 정견이다’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비구들이여, 정견은 [8정도 수행의] 시작이다.
왜 정견이 시작인가?
잘못된 견해는 잘못된 견해라고 이해하고
바른 견해는 바른 견해라고 이해한다.’
『잡아함경』 제28권 「사견정견경」
그러므로 이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하기 전에 정견을 먼저 확립하도록 가르친다.
정견의 확립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무상과 고와 무아로 보고,
4성제의 관점에서 보아 모두 연기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으로 파악해야 고정된 판단 근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견으로 성숙하고, 정견을 통해서 정화될 수 있다.
자유로 가는 길, 즉 명확한 통찰력을 얻는 것을 출세간적 정견이라 한다.
정견은 불교 수행의 첫 걸음으로써
올바른 견해 없이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불교 수행의 기초가 된다.
둘째는 정사유이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으로서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바를 잘 분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다.
정사유란
‘번뇌에서 벗어난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를 끼치지 않는 생각’으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중에서
탐진치 삼독(三毒)에 물든 생각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울러 온화한 생각, 청정한 생각, 자비로운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즉 정견의 바탕 위에서 자기 생각의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그릇된 생각을 지양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사유이다.
셋째는 정어로써 올바른 말을 뜻한다.
즉 정견과 정사유에 따라 항상 깨어있는 마음[正念]으로
올바른 언어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짓된 말, 남을 헐뜯는 말, 남을 상하게 하는 거친 말,
쓸데없는 잡담과 같은 옳지 못한 언어적 행위를 자제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순간 바로 모든 선악시비와 갈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말의 흐름을 잘 관찰하여 잘못된 구업(口業)을 짓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서 진실된 말, 남을 이롭게 하는 말,
부드럽게 화합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이며 이는 올바른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정어에서 의미하는 언어적 행위 외에
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며 음란한 행동을 하고 술에 취하는 것과 같이
몸으로 행하는 잘못된 신업(身業)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생명을 살리고 남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어와 정업은 바른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바른 행위를 뜻한다.
다섯째는 정명으로서 올바른 생활을 뜻한다.
정명은 규칙적이고 건전한 생활을 하며
올바른 직업을 통해 정당하게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식사, 수면, 업무와 같이 건전하고 절제된 일상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속이고 피해를 입히는 직업보다는
올바른 직업윤리를 지니고 정당한 직업을 통해 생활하도록 권장한다.
이렇듯 정명은 올바른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정정진이며 올바른 노력을 의미한다.
정정진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목표를 향해
용기를 내어 물러섬이 없이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즉 모든 괴로움과 번뇌의 주범인 근본 무명을 반야지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사정근) 측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네 가지 바른 노력이란?
이미 생긴 악은 없애려고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하고,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게 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막고, 버리고, 증가시키고, 유지하는 것,
이것이 붓다가 가르친 사정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면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정정진이라 한다.
일곱째는 정념으로
바른 깨어있음, 바른 마음챙김, 바른 관찰, 바른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지킴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정념이란 4념처(四念處), 즉 신체, 느낌, 마음,
그리고 모든 현상은 항상 변하며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늘 새기며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의 실상을 파악하여
찰나찰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잘 관찰하는 것이다.
이 정념수행은 단순히 4념처 수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수행법에 적용된다.
염불수행을 할 때는 불보살님의 명호가 생각생각 이어져야 하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화두챙김에 끊임이 없어야 한다.
팔정도의 마지막인 여덟 번째 정정은
올바른 정신집중 또는 올바른 선정을 의미한다.
즉 마음을 바르게 한 곳에 집중하여 삼매(三昧)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정은 올바른 정신집중의 노력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팔정도는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대표적인 불교수행법으로서
여덟 가지 측면에서의 수행을 뜻한다.
이러한 팔정도를 계(戒 : 정어, 정업, 정명), 정(定 : 정정진, 정념, 정정),
혜(慧 : 정견, 정사유) 3학(三學)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수행 내용에 따라 세 가지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삶과 사물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이는 팔정도의 첫 덕목인 정견에서 제시되는 것으로서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즉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삼법인, 12연기, 중도설, 무아설 등을
깊이 궁구하여 삶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정립하는 것이다.
둘째는 올바른 견해에 근거하여 실천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정사유로부터 정정진에 이르는 수행은 사고, 언어, 행동, 생활을 포괄하는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제로 체험하는 수행이다.
정념과 정정이 이러한 체험적 수행에 해당한다.
즉 정념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괴로움과 번뇌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정정을 통해 올바른 정신집중을 하여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난 적멸한 경지인 삼매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 수행의 완성은 괴로움의 소멸[滅聖諦]이며,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해 있음을 확연히 체득한 것이다.
연기법의 체득은 지혜의 완성이며,
이는 팔정도의 첫 번째 덕목인 바른 안목[正見]을 온전히 갖춘 것이다.
모든 존재가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로 연기해 있음을
확실히 깨달았기에 이를 지혜(智慧)라 하고,
지혜는 자비(慈悲)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지혜의 성취와 자비의 실천은 불교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결국 불교의 핵심 교설은 연기법이므로
마지막으로 연기법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한 12연기를
생활속에서의 수행과 연관지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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