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 - 제2절 불교의 핵심교리 - 3. 삼법인 - 3) 무아의 실천적 의미

문성식 2016. 11. 2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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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
      제2절 불교의 핵심교리 3. 삼법인
        3) 무아의 실천적 의미 괴로움만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나’도 실체가 없다. 즉 무아이다. 위에서 연기법을 설명할 때, ‘나’라는 존재는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연기해 있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도 내가 아니며, 느낌, 개념, 생각 등도 또한 내가 아니다. 이 몸이란 부모님을 의지해 태어난 것이며, 느낌, 개념, 생각 등이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살아오며 부딪쳐 온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배워 익혀 온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신의 지ㆍ수ㆍ화ㆍ풍(地 水 火 風) 또한 이 우주의 가득한 그 물질을 잠시 인연에 맞게 빌어다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늘 먹고 있는 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한 톨의 쌀이 있기 위해서 땅과 물, 태양빛과 공기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농부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야 양질의 쌀을 얻을 수 있다. 이 쌀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밥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물[水]과 열[火]의 인연을 만나야 한다. 밥은 밥이지만 우리가 먹고 나면 밥은 더 이상 밥이 아닌 몸속의 자양분으로 된다. 살이 되고 뼈가 되어 ‘내 몸’이 되는 것이다. 밥상의 국도 반찬도 과일도 먹고 나면 ‘내 몸’이 된다. 물도 물이지만 마시고 나면 ‘나’가 되고, 공기도 공기지만 들이마시고 나면 ‘나의 호흡’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본래부터 ‘나’ 혹은 ‘나의 것’이였던 것은 하나도 없다. 잠시 인연에 따라 나에게로 오면 그것을 보고 ‘나’라고 이름 지어 집착하는 것일 뿐이다. 어머니의 뱃속에 처음 잉태되었을 때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한 방울의 이슬과 같았다. 이 이슬방울과 같은 몸이 어머니가 주신 자양분을 의지해서 지금 우리의 몸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까지 지금 이 모습, 이 세포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머리도 변하고 살결도 변한다. 끊임없이 ‘나의 모습’은 변한다. 이처럼 변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나’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느낌, 생각, 가치관 등에서 ‘나’라는 실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좋다 혹은 싫다’라고 느낄 때 그 느낌이 ‘나’일까? 나의 느낌이며, 생각이며, 가치관이며 세계관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이거나, 교육을 통해서 배웠거나, 살아오며 경험하고 환경에 의해 익혀 온 개념이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가정, 이웃, 사회, 국가라는 환경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책과 대중매체를 통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받아들인 정보를 내 느낌, 내 생각, 내 사상, 내 가치관이라 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배우고 익혀서 받아들인 느낌, 생각, 가치관, 관습,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점령하여 온통 나의 가면을 덮어쓰고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성격의 온화함과 포악함, 몸매의 좋고 나쁨, 능력 혹은 지식의 차이, 근기의 우열, 이 모든 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과 조건들이 만났을 때 연기해 생겼을 뿐인데 ‘나’라는 주머니 속에 주워 담고는 좋으니 싫으니, 행복하니 불행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날씬하니 뚱뚱하니, 크니 작니, 숱한 분별과 비교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나’와 남을 구분하여 비교하면 할수록, ‘나’라는 주머니는 자꾸자꾸 커져만 간다. 너무 커져 주체할 수 없어 결국 쓰러지게 된다. 그냥 놓아버리면 모든 분별심이 딱 끊어져 온통 환히 밝아지고 자유로운 줄을 모른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모든 시비가 끊어지고 삶이 편안하고 맑아진다. 무아를 실천하면 삶이 복되고 넉넉해진다. 달려오는 기차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아이를 구하다 발목이 잘린 어느 역무원의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일화나, 일본인 지하철 승객을 구하려고 철길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은 어느 한국 유학생의 국경을 초월한 감동적인 행위는 바로 무아적인 실천행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