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제2절 불교의 핵심교리
4. 사성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펴신 최초의 설법은
고ㆍ집ㆍ멸ㆍ도(苦ㆍ集ㆍ滅ㆍ道)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는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인 동시에 일생의 설법이다.
부처님은 성도 후 수 주일 동안 선정에 잠기신 후
자신의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찾아 베나레스의 녹야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고ㆍ집ㆍ멸ㆍ도 사성제법을 설했다.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사성제를 설했다고 해서 그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최초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해서 불교교단이 성립된다.
불교교단이 성립하려면 불ㆍ법ㆍ승(佛 法 僧)의 3보(三寶)가 있어야 하는데,
사성제를 설한 초전법륜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고 전할 제자들이 생긴 것이다.
먼저 경전의 말씀을 읽어보자.
부처님께서 베나레스의 녹야원에 머무르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네 가지의 성스럽고 참다운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것은 괴롭다는 진리요[苦聖諦 고성제],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쌓임에 있다는 진리요[苦集聖諦 고집성제],
셋째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요[苦滅聖諦 고멸성제],
넷째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의 진리[苦滅道聖諦 고멸도성제]다.
만약 수행자로서 이미 모든 것이 괴롭다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며[知 지],
괴로움이 원인이 쌓임에 있음을 알고 끊으며[斷 단],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를 알고 증득하며[證 증],
괴로움이 사라지는 방법의 진리를 알고 닦았다면[修 수],
그런 사람은 빗장과 자물통이 없고,
구덩이를 편편하게 고르고,
모든 험하고 어렵고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리라.
그는 어질고 성스러운 사람[賢聖 현성]이라 부를 것이며
거룩한 깃대를 세웠다고 하리라.”
『잡아함경』 제15권 386경 「현성경(賢聖經)」
여기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세계라는 현실과
그 고통의 원인, 괴로움이 멸한 세계, 그리고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깨우쳐 주신다.
이 사성제의 실천구조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원리와 유사하다.
고(苦), 즉 괴로움은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의 증상에 해당된다.
그리고 집(集), 즉 미혹과 집착의 갈애(渴愛)는 발병의 원인이 된다.
멸(滅), 즉 괴로움이 멸해서 평안한 상태는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도(道),
즉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현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은 길고 먼 윤회의 길로 추락하는 경로를 나타내고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하는 방도는 영원한 행복과 자유가 있는
열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파악한 현실의 괴로움은 어떤 것인가?
1) 괴로움
사성제의 첫 번째는 괴로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즉 고성제이다.
현실의 괴로움은 보통 4고ㆍ8고(四苦 八苦)로 분류한다.
생ㆍ노ㆍ병ㆍ사(生 老 病 死)라는 삶의 모든 과정에 대한 4가지 괴로움에
다른 4가지 괴로움, 즉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해서 8고라 한다.
삶을 받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누구나 겪어야 하는 보편적인 괴로움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정든 환경을 떠나야 하는 괴로움,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괴로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
마지막으로 5온은 나와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위와 같은 괴로움에 대한 여실한 인식이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괴로움을 늘 겪고 있으면서
인간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 진리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미운 사람을 만나면
당장 괴롭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망각하고 지낸다.
불교 수행의 출발점은 괴로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인데,
고의 실상을 바로 보는 순간 고통을 여의고 안락함[離苦得樂]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도 있고
전쟁 중에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을 여의고 안심입명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 괴로움을 직시해야 한다.
고통의 무게를 못 이겨 삶을 포기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은
정말 헤어 나오기 힘든 암흑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적진을 향해 달리는 용맹스런 장수처럼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당당하게 괴로움과 맞설 때
그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여 원인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2) 괴로움의 원인
사성제의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즉 집성제이다.
집(集)이란 ‘함께 모여 일어난다[集起]’는 뜻이다.
무엇이 함께 모여 일어나는가?
인간의 근본 미혹으로 인한 욕망과 애착이 모여 괴로운 번뇌가 일어난다.
이것을 한 마디로 ‘갈애(渴愛)’라 한다.
욕망의 갈증과 존재에 대한 애착이다.
이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인 것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 좋은 향기, 좋은 맛,
감촉이 좋은 것만을 탐한다.
그 욕망의 정도는 끊임이 없다.
하나를 충족시키면 둘을 요구하고 둘을 들어 주면 셋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욕애(欲愛)’라고 한다.
좋은 것만을 탐닉하는 인간의 성향 이면에는
‘나’라는 존재가 영원하여 좋은 것을 항상 향유하기를 바란다.
지금 이 목숨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 생에 대한 갈애와 집착이 ‘유애(有愛)’이다.
이처럼 욕애와 유애를 추구하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허무를 탐닉한다.
이것을 무유애(無有愛)라 한다.
쾌락주의의 극치는 허무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극단에 치우친 태도는 항상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며 역동적이다.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 중에서
“최초의 진리가 괴로움의 인식이고
괴로움의 원인을 여실히 관찰하고 인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괴로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자살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카드빚에 쪼들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동반자살한 가족,
부도를 내고 자살한 중소기업체 사장,
일등에서 이등으로 떨어졌다고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어느 학생,
이들은 모두 자살을 결행할 정도로 이 세계의 고통을 절감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통을 경험하고 자살함으로써 고통을 벗어난 사람들인가?”
물론 이것은 전제가 잘못된 어리석은 질문이다.
자살한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고통을 절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이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괴로움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도피한 것이며,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 소극적이고 무기력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오죽 괴로웠으면 자살까지 했겠냐고 묻겠지만,
사실 그들은 괴로움에 빠져 버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린 것이다.
괴로움에 대한 바른 인식과 괴로움의 원인을 관찰할 생각을 낸다는 것은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삶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성제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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