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8.jpg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불상.

 

밭에 나란히 서 있던 불상 2구를 백제불로 확인하여 백제 불상의 출토 예를 정읍까지 확대시킨 중요한 불상이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이동하여 온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의 장소에서는 대좌나 다른 불상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오른쪽 큰 불상의 머리에는 소발(素髮)의 머리칼에 육계가 팽이처럼 솟아 있다. 군수리납석불좌상보다는 원만한 편이다. 얼굴은 갸름하지만 토실토실한 양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부드럽고 우아한 부피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부피감은 서산마애불이나 예산화전리사면석불(보물 제794호) 등에서 느낄 수 있는, 6, 7세기의 백제불에 꽤 많이 표현된 백제식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민속 습관에 의하여 눈이 파여서 생기 있는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워낙 뛰어난 수법 때문에 동자형의 얼굴 윤곽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남아 있는 코나 입·귀 등의 작고 귀여운 형태도 우아한 동자형 얼굴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우견편단으로 일부 노출된 어깨도 부드러운 양감을 보여 준다. 하지만 가슴이나 어깨의 근육 표현은 다소 비사실적이어서 당시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하체에도 그대로 이어져 다리의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아 원통형의 불신(佛身)을 보여 주고 있다. 왼손은 내려 옷자락을 잡는 것처럼 처리하였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가락을 밑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여원인(與願印) 같은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대의(大衣)는 우견편단으로 입고 있는데, 끝자락을 왼팔에 걸쳐 내린 점이나 다소 묵중한 옷자락이 다리 좌우로 퍼져 내린 수법 등은 물론, 군의(裙衣) 위로 무릎 부근까지 흘러내린 가사 끝단의 처리 등에서 서산마애불상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두 발은 둥근 받침 위에 올려져 있다. 이 아래는 긴 촉이 달려 있어서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이나 곡산불입상 등 당시의 금동불상에 보편적으로 쓰였던 복련대좌(覆蓮臺座)가 있었을 것이다. 광배는 깨어져 머리 부분에만 약간 남아 있다. 신체보다 약간 큰 전신광배였을 것이다.

 

왼쪽의 보다 작은 불상은 오른쪽 불상과 흡사하다. 그러나 첫째 키와 체구가 약간 작고, 둘째 보다 애기적인 형태이며, 셋째 상체가 약간 더 빈약하고, 넷째 옷이 다소 느슨하며, 다섯째 불의가 덜 묵중한 것 등이 다를 뿐이다.

 

이처럼 두 불상은 거의 비슷한 특징을 보여 주는 애기 형태의 석불입상이다. 이러한 불상 양식은 중국의 경우 북주·북제시대부터 수나라 초기에 나타나던 것이며, 특히 북제·주 양식과 비슷한 것이다. 충주 부근에서 발견된 납석불보살병입상과 함께 독특한 양식을 보여 주는 중요한 석불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