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8.jpg 이 삼안총(三眼銃)은 일명 삼혈총(三穴銃)이라고도 칭하는 휴대용(携帶用) 유통식(有筒式) 화기(火器)의 일종이다. 그 구조에서 통신(筒身)을 세모꼴과 또는 횡선(橫線)으로 연결한 것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인마살상(人馬殺傷)을 주목적으로 사용하였지만 때로는 신호용(信號用)으로 사용하였음을 추정케 하고 있다.

인조(仁祖)13년(1635) 8월 이서(李曙)(1580∼1637)가 지은「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삼안총조(三眼銃條)에 의하면 매혈(每穴), 즉 매통신(每筒身)마다에는 소약선(小藥線)이 3촌(寸)인데 화약(火藥)은 3전(錢)이고, 토격(土隔)은 2분(分)이며 철환(鐵丸)은 1개를 사용한다 하였으니 이는 인마살상용(人馬殺傷用)으로 사용한 내용이고, 또한 정조(正祖)14년(1790)에 간행된「무예도보통지언해(武藝圖譜通志諺解)」마상재조(馬上才條)에 따르면 이는 마상재(馬上才)의 일종으로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대한제국동가도(大韓帝國動駕圖)(석지(石芝) 채용신필(蔡龍臣筆))에 의하면, 역시 행렬 최선두에 기병(騎兵)(전입(戰笠)에 호의(號衣)차림)이 이 삼안총을 높이 들고 행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와 같은 체형과 용도의 삼안총이 현재 유존되는 것으로는 육군박물관(陸軍博物館)을 비롯 영남대학교박물관(嶺南大學校博物館)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으나, 그 주조년대를 근거할만 한 명문이 명시된 것은 없고 다만 경주박물관(慶州博物館) 소장의 이 삼안총만이 선조(宣祖)26년(1593) 12월에 주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왜구가 침입한 난중이었지만 그 기법에 있어 매우 능숙한 솜씨로 주조되었고, 따라서 오랜 성상전평시(星霜戰平時)를 경과하였지만 상흔(傷痕)이 전무하게 유존되어 화포사연구(火砲史硏究)는 물론 국방과학기술문화재(國防科學技術文化財) 연구에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