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8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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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171-1 국립진주박물관 |
소재지 | 국립진주박물관 |
지정일 | 1986.03.14 |
수량/면적 | 1점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진주박물관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선중기에 사용하던 유통식 화포(火砲). 1590년(선조 23)에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며 총 길이 64.5㎝, 통신(筒身) 길이 20.5㎝, 약실(藥室)길이 23.5㎝, 포구 지름 23.5㎝로 포구 끝부분에는 띠를 두르고 그 통신 둘림이 점차 좁아지면서 약실과 연결된다.
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부르며 유통식(有筒式) 화기의 한 종류로 조선 태종 때 최해산이 만들었다고 한다. 완구는 크게 완(碗), 격목통(激木筒), 약통(藥筒)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완은 발사물 즉 큰 돌이나 쇠공을 올려 놓는 곳으로 그릇 모양을 하고 있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으로 점화선을 끼우는 점화구멍을 2개 가지고 있다. 약통과 완 중간에는 격목통이 있는데 이 곳에는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폭발력을 완에 전달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격목이 있다.
전체 길이 64.5㎝인 중완구(中碗口)로 1985년 경상남도 하동군 동화리에서 등산하던 주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선조 23년(1590) 9월에 함경도 지방의 이물금(李勿金)에 의해 만들어졌고, 한 번 포탄을 발사하면 사정거리가 1리(里)에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완구는 함경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후 임진왜란 때 도주하는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이 곳 경상남도 하동까지 운반된 것으로 보인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으로 점화선을 끼우는 점화구멍을 2개 가지고 있다. 약통과 완 중간에는 격목통이 있는데 이 곳에는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폭발력을 완에 전달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격목이 있다.
전체 길이 64.5㎝인 중완구(中碗口)로 1985년 경상남도 하동군 동화리에서 등산하던 주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선조 23년(1590) 9월에 함경도 지방의 이물금(李勿金)에 의해 만들어졌고, 한 번 포탄을 발사하면 사정거리가 1리(里)에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완구는 함경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후 임진왜란 때 도주하는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이 곳 경상남도 하동까지 운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중완구(中碗口) 역시 유통식화기(有筒式火器)의 일종(一種)이다. 이는 1985년 12월 15일 진양군 수곡면 원계리 318번지에 거주(居住)하는 김해성씨가 경남(慶南) 하동군(河東郡) 옥동면(玉東面) 동화리 산57번지 등산(登山)길에 우연히 발견하여 매장문화재발견신고(埋藏文化財發見申告)를 거쳐 동년(同年) 12월 20일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에 보고접수(報告接受)된 것이다. 이 중완구는 그 명문(銘文)에 제시된 바와 같이 임란(壬亂)(1592) 2년전인 선조(宣祖) 23년(1590) 9월에 고주포영(高州浦營), 즉 함경도(咸鏡道) 고원(高原)에서 화포장(火砲匠) 이물금(李勿金)에 의해 주조(鑄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사(發射)하면 그 사정(射程)은 일리(一里)에 미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주조술(鑄造術)이 매우 정교(精巧)함은 물론 오랜동안 지하에 매몰(埋沒)된 상태에 있었지만 외상(外傷)의 흔적(痕跡)이 전무(全無)하다.
구연(口緣)은 대선(帶線)과 더불어 마무리하고 이어 그 구연에서 격목통부위(檄木筒部位)에 이르기까지는 유연(柔軟)한 곡선(曲線)을 형성(形成)하고 있으며, 이어 이동(移動)이나 거포(擧砲)에 편리(便利)함을 도모(圖謀)하기 위해 설치한 손잡이인 거금(擧金)은 정중계선(正中界線)에 따라 전후대선(前後帶線)을 사이하여 설치(設置)하였다.
약실(藥室)은 격목통부위에 이어 거금 뒷쪽부터 약간 도톰하며, 약실 뒷쪽에는 중앙계선 (中央界線) 좌우(左右)로 선혈(線穴)을 뚫었다. 더욱 이 완구(碗口)의 발견지가 경남 하동지역이고 보면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함경도 고주포영에서 주조(鑄造)된 후 임란 때 패주(敗走)하는 왜구(倭寇)를 추격할 때 갖추었던 중장비(重裝備)였음을 실증(實證)케 하여준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지난 1986년 4월초 7일에 하동고현성지(河東古縣城址)인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河東郡 古田面 古下里) 574번지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 당시(當時)의 전황(戰況)을 입증하여 주기도 한다. 이 완구는 주조시기(鑄造時期)나 그 상태(狀態)가 정확하고 완전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 직접 참전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함은 물론 화기발달사연구사료(火器發達史硏究史料)로 그 가치가 높으며 국방과학기술문화재(國防科學技術文化財)로도 높이 평가된다.
구연(口緣)은 대선(帶線)과 더불어 마무리하고 이어 그 구연에서 격목통부위(檄木筒部位)에 이르기까지는 유연(柔軟)한 곡선(曲線)을 형성(形成)하고 있으며, 이어 이동(移動)이나 거포(擧砲)에 편리(便利)함을 도모(圖謀)하기 위해 설치한 손잡이인 거금(擧金)은 정중계선(正中界線)에 따라 전후대선(前後帶線)을 사이하여 설치(設置)하였다.
약실(藥室)은 격목통부위에 이어 거금 뒷쪽부터 약간 도톰하며, 약실 뒷쪽에는 중앙계선 (中央界線) 좌우(左右)로 선혈(線穴)을 뚫었다. 더욱 이 완구(碗口)의 발견지가 경남 하동지역이고 보면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함경도 고주포영에서 주조(鑄造)된 후 임란 때 패주(敗走)하는 왜구(倭寇)를 추격할 때 갖추었던 중장비(重裝備)였음을 실증(實證)케 하여준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지난 1986년 4월초 7일에 하동고현성지(河東古縣城址)인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河東郡 古田面 古下里) 574번지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 당시(當時)의 전황(戰況)을 입증하여 주기도 한다. 이 완구는 주조시기(鑄造時期)나 그 상태(狀態)가 정확하고 완전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 직접 참전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함은 물론 화기발달사연구사료(火器發達史硏究史料)로 그 가치가 높으며 국방과학기술문화재(國防科學技術文化財)로도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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