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협의하고 조선군사령부(광복단결사대) 조직에 착수하여 먼저 군사령부의 장교는 상해임시정부로 보내 양성하고 병졸은 간도로 보내 양성하기로 했으며, 또 결사대를 조직하여 그중 처단단을 선출 조선총독․정무총감․이완용․송병준 및 조선인 형사를 암살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한훈 선생의 재판기록 중에서(1922년)
작지만 대담하고 침착한 성격의 투사
한훈(韓焄, 1890.2.27~1950)선생은 1890년 2월 2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君) 사양면(斜陽面) 흥산리(興山里)에서 한성교(韓省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당숙인 호교(互敎)에게 입양되었다.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본명은 우석(禹錫), 자(字)는 성초(聖初), 호(號)는 송촌(松村), 그리고 만우(萬宇)․동열(東烈)․조주사(曹主事)․조선달(曹先達)이라는 가명(假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5척 단구(短軀)의 야윈 몸에 넓은 양미간과 자그마한 눈의 소유자로 대담하고 침착한 성격을 지닌 투사였다.
선생이 태어난 충남 청양은 대한제국 정부의 지계(地契)사업에 항거한 농민운동이 발생하였던 지역이며, 충남의 대표적 의병인 홍주의병이 봉기했던 지역과 근접해 있다.
이런 지역적 특성으로 홍주의병이 봉기했을 때 많은 청양의 인물들이 홍주의병에 가담했다. 홍주의병은 선생이 독립운동에 몸담게 되는 시발점이었으며, 이후 전개한 의열투쟁의 정신적 기반이었다.
선생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는 홍주의병에 가담해 청양 정산의 칠갑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외숙(外叔)의 유언 때문이었다. 외숙의 유언을 듣고 선생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목적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것이다. 홍주의병에는 선생뿐만 아니라 친형인 한태석(韓泰錫)도 함께 참여했다. 한태석 역시 선생 못지 않게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분이었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자 선생에게 재산의 일부를 떼어 주며 독립운동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8년간의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두 형제가 홍주의병을 계기로 항일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악질 직산 군수 처단하고 만주로 1차 망명길에 올라
당시 선생은 홍주의병 가운데 이용규(李容珪) 휘하에 소속되어 부여․노성․연산․공주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선생은 신도안에서 은거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나철․오기호 등도 이때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는데, 여기에 선생은 지방결사대로 참여하려고 했으나 나철 등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악질 직산 군수를 처단하고 만주로 1차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선생이 만주에 망명해 있는 동안 조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근간으로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감행하였다. 한국 민족의 기본권 박탈은 물론 극도의 감시와 통제 아래 민족운동 세력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한국민의 독립운동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해외에서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에 입각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무단통치라는 억압 속에서도 비밀리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해 갔다. 이들 단체들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만주행은 선생의 항일투쟁에 있어 일대 전기(轉機)가 되었다. 선생은 만주를 오가며 뜻을 같이하는 많은 애국지사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채기중(蔡基中)과의 만남은 선생의 독립운동에 전환점이 되었다. 선생은 채기중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풍기는 <정감록>에 10승지(十勝地)로 알려진 곳으로 많은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던 곳이었다. 광복단에는 선생을 비롯해 많은 우국지사들이 가입해 활동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으로는 생활근거를 잃고 모여든 이주민 출신들이었으며, 민족적으로는 의병적 기질의 인사들이었다.
만주에서 권총 가지고 귀국하여 친일 부호들 상대로 독립군 군자금 모집
광복단의 선결문제는 군자금의 확보였다. 당시 서간도에서는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많은 이주민들이 건너가 있었는데 흉년과 풍토병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단에서는 일본인 광산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을 최대의 활동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광복단에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에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경상도 일대에서는 부호들을 대상으로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이 같은 활동을 위해 급선무였던 것은 무기를 갖추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무기구입을 위해 광복단 대표로 직접 만주로 건너가 권총을 구입해 가지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 선생은 활동영역을 전라도지역으로 확대하였다. 당시 선생은 전라도 지역에서 홍주의진 출신의 곽한일․김재순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침략의 원흉을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해방되던 해에 작성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서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4246년(1913년) 만주 길림에서 권총 2정을 반입하여 풍기 채기중과 유장렬․김상옥 등과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고, 무기구입차 광복단 대표로 만주 훈춘으로 가 한창섭에게 권총 3정을 구득(求得), 귀국하여 곽한일․김재순 등과 밀의, 고종황제의 밀권(密權)으로 도일하여 조선침략의 원흉을 제거코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재차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재차 만주로 망명하였지만,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향한 굳은 의지는 선생을 거기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다시 국내로 잠입해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서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지역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의 광복단이 연합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큰 흐름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 이념과 투쟁방략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단체들은 계몽운동계열의 공화주의 정치이념과 의병전쟁의 무장투쟁방략을 서로 수용해 통일된 형태의 운동노선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성격의 대표적인 국내독립운동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구성원들의 성격을 통해서도 대한광복회의 그러한 성격은 잘 드러난다. 풍기광복단이 의병적 기질을 가진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라면,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운동계열의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1913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은 중산층 이상의 계몽운동계열 인사들이 중심이 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해외독립운동을 지원할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이 가운데 박상진(朴尙鎭)을 비롯하여 혁명적 기질을 가진 인사들과 풍기광복단의 인사들이 합류하여 조직한 것이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조달․혁명기지건설․총독 및 친일부호 처단․무기구입․독립군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국내혁명단체였다.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100여 곳에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때를 기다렸다가 독립전쟁을 수행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방략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천강령을 제정하였다.
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④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만(韓滿)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선임하고, 이석대를 부사령으로 임명하여 만주에 상주시켰다.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지역 책임을 맡아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에 전력을 다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자산가들에게 고시문을 보내고 자발적인 의연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자금 모집은 부호들의 의연금으로 충당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식민지권력에 안주하려는 이들이 군자금 모집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되지 않자 고시문의 효력을 높이고 군자금 모집을 원활히 하기 위해 친일부호의 처단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의열투쟁은 군자금모집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파들에게 민족적 응징을 통해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17년 경북 칠곡의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으며, 충청지부에서는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여 친일부호와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대한광복회 소속으로 악질 부호들 응징하고, 일본 헌병대 습격
이때 선생은 전라도에서 활동하면서 1916년 보성의 양재성(梁在誠)과 별교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하였다. 이밖에 서도현 당질인 서인선을 납치하여 75일 동안 감금시켜 1만원의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전북 순창의 오성(烏城) 헌병분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을 정도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이처럼 선생은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을 선도하여 이끌었던 분이었다. 장승원․박용하 처단사건 이후 대한광복회는 세상에 알려지면서 단원들이 일경에 체포되고 주요 인물들이 사형 당하여 조직이 거의 파괴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광복회의 명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대한광복회 요원들이 체포된 후, 선생은 만주를 오가며 새로운 항일투쟁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다시 국내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선생은 대한광복회 부활을 구상했다. 선생은 이때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 등과 함께 활동했는데, 이들은 모두 대한광복회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던 동지들이었다.
김상옥 의사와 동지 일동(1948). 김상옥(金相玉)과 함께 활동했던 한훈·명세재·윤익중·김동순·신화수·서대순 등이 함께 찍은 사진. 아랫줄 제일 오른쪽이 한훈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와의 연계활동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광복단 대표로 선생이 상해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난 선생은 서울을 중심으로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려는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임정의 지원 약속을 받고 귀국한 선생은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광복단결사대는 모병(募兵)과 암살(暗殺)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에 요원을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그 중에서 암살단원을 선발하여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그리고 민족반역자와 조선인 형사를 처단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선생은 또 중국 안동으로 들어가 임시정부 파견 요원으로부터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선생의 이런 노력으로 광복단결사대가 무기를 갖추게 됨으로써 국내에서 의열투쟁 기반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단결사대 조직한 후 조선 총독 처형 계획과 대규모 폭파 계획 추진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한 후, 선생은 전라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면서 의열투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광복단 결사대가 조직되어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을 때, 김상옥(金相玉)을 중심으로 암살단(暗殺團)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암살단은 친일 조선인과 형사를 처단하고 조선인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군자금을 길림군정서에 제공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암살단의 취지와 목적은 선생이 주도하던 광복단 결사대의 목적과 같았다. 따라서 선생과 김상옥은 회합을 갖고 두 단체가 연합하여 행동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당시 암살단은 길림군정서로부터 무기를 대량으로 입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기와 탄약이 절실하던 참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암살단과 연합하면서 이미 국내에 반입해 놓은 무기를 공유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두 단체가 쉽게 연합해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선생과 김상옥은 풍기광복단에서 같이 활동한 인연이 있었고, 또 두 단체 모두 의열투쟁을 투쟁방략으로 하였기 때문에 기맥(氣脈)을 통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후 사돈지간이 될 정도로 두 분의 동지적 결합은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단결사대와 암살단은 첫 거사로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환영 나온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미국의원단이 남대문역에 도착했을 때 암살단취지서 및 통고문․경고문을 환영군중들에게 살포하고 자동차를 이용한 사격전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자동차에 폭탄을 싣고 가서 총독 이하 일본관리들을 처단하는 한편,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관공서와 일본경찰서 등을 폭파한다는 세부계획을 수립하였다. 통고문은 이때 조선인으로 중추원 참의나 일제 고등관이 된 자들에게 배포하고자 한 것이다. 경고문은 조선인 형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등(君等)은 조선의 혈통을 받고 배달민족이란 긍지 아래 살아 왔거늘 어찌하여 부모의 육신을 깎고 형제의 피를 빠는가! 하늘이 뜻이 있다면 어찌 천벌이 없을 것이며 신(神)이 뜻이 있다면 어찌 재앙이 없을 소냐! 아 금수(禽獸)만도 못한 어리석은 무리여 그러고도 오히려 생명을 보존코자 하니 개탄치 않을 수 없다. 한번 기회가 오면 누가 너희들의 일편고기를 회치고 싶지 않을 자 있으며, 한 줌의 소금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자 있으랴! 그 후에 남을 너희들의 자손은 또한 어이 하려나?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보내려는가 또 어느 지옥의 한 모퉁이에 방황케 하려는가? 오늘날 저 철창에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은 모두 누구 때문인가?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義士)들이거늘 군들은 이 의혼(義魂)을 죽이는 마귀에 그치려는가? 더 말하지 않겠노라.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거느린 자로서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있는 행동인가 깊이 생각하여 보라. 그러고도 오히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여 보라.
그러나 미국위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 일제경찰의 예비검속이 이루어지면서 김상옥의 집이 먼저 수색을 당하였다. 김상옥은 일경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선생은 체포되었다. 이어 광복단 결사대원과 암살단원들이 체포됨에 따라 거사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광복단 결사대의 재판과정은 연일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민족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3․1운동 이전 시기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졌던 대한광복회의 요원들이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선생은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는 당시 재판과정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던 《동아일보》의 기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한훈은 원래 이 사건의 중요한 수령이니만큼 답변할 때 태도가 매우 냉담하야 다른 피고와 같이 허둥지둥하지 아니하며 피고석에 꼿꼿이 앉아서 입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광복단 결사대장으로 활동한 선생은 8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이후 대한광복회 요원으로 서도현 등을 처단한 것이 추가로 확인되어 5년 형이 추가되었다. 선생은 옥고를 치르는 중에도 단식을 통해 일제에 투쟁하는 등 불굴의 저항의지를 표출하다가 1929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하지만 옥고로 인해 얻은 병과 일제의 감시로 출옥 후에는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충남 신도안에 은거하면서 학병 거부자와 탈출병 등을 은신(隱身)시키면서 이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육혈포암살단 검거>(동아일보 1920년 8월 26일자 기사 사본) 일경이 김상옥의 집을 급습하여 한훈을 검거하였으나 김상옥은 피신하였다는 내용이다. 일경의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한훈 선생이 의거에 참여하여 검거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광복 후 광복단 재건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 전개…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돼 피살
선생은 해방 후 상경하여 광복단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해방 직후 건국단체가 우후죽순으로 난립하고 정부의 수립이 지연되는 상황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광복단을 재건하여 광복정신에 기초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재건된 광복단의 단장에 취임한 선생은 임시정부의 이념에 따라 자주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추진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단체가 통합할 것을 주장하였다. 재건 광복단은 <광복단재흥(光復團再興)의 동기(動機)>에서 그들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조국의 주권을 광복하자
2. 건전한 자주독립국가의 완성 및 발전을 도(圖)하자
3. 세계안전과 평화를 도(圖)하자
이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광복단은 광복 정신의 철저화(徹底化)운동․국민 조직의 단결화 운동․농촌산업의 건전화 운동․경제생활의 자력화 운동․민족문화의 창조화운동․세계인류의 평화화운동 등을 실천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광복단에서는 광복의숙(光復義塾) 설립, 실험농장(實驗農場) 설치, 동서문화연구회 조직 등을 계획하면서 민족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내외사정조사회(內外事情調査會)를 조직하여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계발,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여 이러한 계획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광복단의 지부는 선생이 거주하던 신도안에 설립된 신도지부가 대표적이었다. 신도지부에서는 대전과 신도안에서 반탁시위를 주도하였는데, 당시 광복단의 활동은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던 많은 애국단체들의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선생의 활동은 한국전쟁 중, 선생이 북한군에 납치되어 피살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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