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윤병구 대한인애국회 총회장

문성식 2015. 8. 9. 23:04

윤병구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 위해 헌신한 대한인애국회 총회장

종교 활동을 위해 하와이로 이주했던 윤병구 선생은 하와이 내 항일운동단체 ‘에와친목회’를 거쳐 도미,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미국 내 한인독립운동단체 활동과 외교선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유럽순방외교를 펼쳤으며 대한인애국회 총회장으로 두 번이나 당선되어 미국 내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였다.

하와이 신민회의 중심인물로 활동

윤병구 이미지 1

선생의 출생지와 출생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서울 또는 경기도 양주로 알려져 있고 출생연도는 1877년 또는 1880년으로 나타난다. 이는 구한말 그의 행적이 확실하지 않은데다 1905년경까지 우병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서 잘 드러나지 않은 때문으로 보인다. 선생은 구한말 한성사범학교를 다녔고, 당시 교사 헐버트와의 만남을 계기로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은 기독교 전도자의 사명을 가지고 이주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호놀룰루 미국 감리교의 피어슨 감리사와 협력하여 하와이 군도에 산재하고 있는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이 때 함께 선교활동을 했던 목회자는 현순, 김영식, 홍치범, 문경호, 이경식 등이다. 한편 선생은 하와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도 병행하였다. 1903년 8월 7일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최초의 정치단체인 신민회가 결성되었는데 선생은 뒤늦게 참여한 홍승하와 함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선생은 신민회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의식을 키우게 된다.

한편 1905년 4월 신민회가 해산되자 정원명, 강영소, 김성권, 이만춘, 김규섭 등과 함께 그 해 5월 3일 에와친목회(회장 정원명)를 결성했다. 설립 목적은 항일운동을 위한 일화(日貨)배척과 동족간의 친목과 권익보호였고 1906년 5월 1일부터 <친목회보>를 발간했다.

수포로 돌아간 루즈벨트 청원

국권회복을 위한 선생의 첫 번째 대외활동은 러일강화회의에 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문제를 호소하기 위한 총대로 선출되면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잇따른 승리로 전세가 우세했으나 막대한 전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더 이상의 전쟁 확대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05년 7월 초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를 중재하겠다고 제의하면서 그 해 8월 포츠머스에 러일강화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하와이 한인사회는 러일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선생에게 그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때마침 미국 국방장관 윌리암 태프트가 7월 7일 루즈벨트의 영애인 앨리스와 함께 일본으로 가는 길에 호놀룰루에 들리자 선생은 한인대표의 자격으로 그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선생은 태프트와의 만남을 통해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았다. 이어서 7월 12일자로 ‘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Petition from the Koreans of Hawaii to President Roosevelt)’를 작성했다. 청원서의 내용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 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7월 15일 하와이의 한인들은 에와 사탕수수 농장에 모여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선생을 하와이 한인 7,000명을 대표한 공식 총대로 선출해 전권을 위임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총대로 선출된 선생의 여행 경비를 위해 500달러를 모금해 전달했다.

<대도(大道)> 제3권 제2호.(1911.9)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인들의 북미감리교회의 기관지. 선생이 주필을 맡았다.

이에 선생은 당시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입학을 위해 준비 중이던 이승만에게 타전해 외교활동의 참여를 부탁했다. 그리고는 7월 19일 알라메다호를 타고 하와이를 떠나 미국 동부로 향했다. 선생의 활동은 러일강화회의의 참관인으로 활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주목적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미리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한인들의 희망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7월 31일 워싱턴DC에 도착한 선생은 이승만을 만났고 두 사람은 다시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을 찾아가 청원서의 문장을 다듬고 거사진행의 방안을 상의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8월 4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새거모어 힐(Sagamore Hill)을 찾아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청원서를 직접 제출하였다. 그런데 루즈벨트는 내용을 읽어본 후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관을 통해 국무성에 제출해 달라 하고는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루즈벨트는 이미 두 사람이 당도하기 전에 일본에 보낸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佳太郞)와의 회담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묵인하는 대신 한국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의 행동에 미국이 동의한다는 의사를 7월 31일자 전보로 동경에 보낸 바 있었다. 즉 선생과 이승만이 당도하기 전에 미국 정부는 일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속방화를 묵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태프트의 소개장이나 루즈벨트의 접견은 모두 형식적인 겉치레로써 두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이런 내막을 알 수 없었던 선생과 이승만은 1882년 5월에 조인된 한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아무 효용이 없었다. 더구나 워싱턴의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의 지령에 따라 청원서 전달을 거부함으로써 두 사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유럽순방 외교

한편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특사로 활동한 이상설이위종이 뉴욕에 도착하였고 이때 선생은 로아녹 대학에서 공부하던 송헌주와 함께 한국특사의 활동에 합류하게 된다. 이에 9월 3일 헤이그에서 국제기자협회를 상대로 선생은 일본의 침략 야욕과 한국민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다룬 주제 연설을 했다.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개혁을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민을 상대로 무지한 강탈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평화회의보>, 1907. 9. 6). 선생의 주제 연설은 이후 장내에서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그는 런던에 가서 영국의 주요 사회단체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상은 영국의 유력 신문에 보도되어 블라디보스톡에까지 알려졌는데 이 지역에서 발행하던 <해조신문>은 1908년 3월 19일자와 20일자에 윤병구의 연설내용과 활동상을 자세히 소개하며 그의 활동을 높이 치하하였다. 선생은 이상설, 이위종, 송헌주와 함께 장기간의 유럽 순방외교를 마치고 1908년 3월 초 뉴욕에 돌아왔다.

선생이 유럽순방외교를 마치고 미국 뉴욕에 돌아왔을 때 미주한인사회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첫째는 1908년 1월 박용만이 자주독립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안한 북미 대한인애국 동지대표회를 추진 중에 있었고, 두 번째는 같은 해 3월 장인환전명운이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일로 전 미주한인들이 일치단결해 사건 해결을 변호할 때였다. 선생은 친분 있는 박용만의 제안에 호응해 뉴욕에 있던 김헌식과 함께 7월 9일 덴버에 당도해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했다. 북미 대한인애국 동지대표회는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박용만, 이관수, 이승만, 윤병구 등 36명의 한인들이 참석해 개최되었다. 대회 운영은 회장 이승만, 국문서기 박용만, 영문서기에 선생이었다. 선생은 개회식에서 “동양에 대한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가 끝난 후 선생은 덴버를 거쳐 1909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당시 상항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던 양주삼 전도사가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 동부로 떠나게 되자 선생은 12월부터 그의 후임자가 되어 상항한인교회의 목회를 담당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

3년 후 1912년, 선생은 11월 8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에 박상하와 함께 하와이지방총회를 대표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선생은 제2대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서 선생의 활동은 그리 두드러지지 못했다. 헌장의 수정으로 위상은 강화되었지만 중앙총회가 독자적으로 외교사무를 추진할 예산이나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인 선생이 북미지방총회 대의회 의장에게 보낸 서신(1920.12.15)

이런 가운데 선생은 각 지방을 순방하며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노력을 했다. 또한 선생은 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농장 일도 병행하였는데 1914년 1월 농업상의 손실을 입어 먼 곳으로 이사하게 되자 더 이상 회무를 집행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중앙총회장 사면을 청원해 그 해 3월 의원 면직했다. 사면한 뒤 그는 워싱턴주의 섬너(Sumner)와 위니치(Wenatchee) 등으로 거주지로 옮겼다. 특별히 위니치에서 그는 한인교육회를 설립해 한인 청년들의 학업증진을 후원하는 일을 했다. 그가 한인교육회를 설립한 데는 경제와 실업방면에서 독립해야 정치상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한인학생들에게 농·공 분야의 실용 학문을 장려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3·1운동 소식이 미주한인사회에 전파되자 선생은 또 다시 대외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먼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3·1운동 소식을 전달 받은 3월 9일 저녁 임시협의회를 개최하고 선생과 정인과를 교섭위원으로 선임해 미국 내 종교계와 사회단체에 한국독립에 대한 동정여론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에 대해 선생은 3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각 도시를 순회하며 본격적 활동을 펼쳤다. 3·1운동 이후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안창호의 상해행 이후 공석 중이던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또 다른 총회장 후보이자 북미총회장을 역임한 이대위를 제치고 당선되었는데 대한인국민회에서 중앙총회장을 두 번씩 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앙총회가 할 수 있는 권한이나 예산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특별히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가 시행하고 있던 애국금 모금을 중지하고 공채금 모집을 요구하면서 발생한 애국금-공채금 논쟁과 구미위원부의 설립으로 나타난 대외활동의 위축 등으로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이 크게 추락하면서 중앙총회장으로서의 그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임정대표단에 선출되어 활동

한편 미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독립에 대한 희망이 더욱 밝아 오자 미주한인들은 미주한인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미국 국방공채를 매입하거나 한인경위대를 설립해 미국 국방을 후원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것은 미일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돕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하루빨리 앞당길 수 있다는 미주한인들의 절박한 희망이기도 했다. 이런 독립의 염원을 갖고 미주한인사회의 많은 젊은 청년들이 미군에 자원 입대하기 시작했다. 1944년 12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북미 한인청년의 경우 195명이 입대하였다.

선생은 미일전쟁 이후 한인청년들의 미군 입대가 증가하고 또 자신의 아들도 1942년 미국 해군에 입대하자 1943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결성했다. 그가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설립한 것은 미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인 청년들을 돕고 이들 가운데 특별히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함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 국방을 후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로 참전 자녀의 부모들과 그 친족들을 결속시켜 참전 한인청년들의 안전과 미군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재미한인들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드러내려 하였고 미국 정부로부터 임정승인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영문잡지를 매월 손수 편집, 제작하여 미국의 정치, 종교, 지식계층에 배포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널리 알렸고 한인 2세 청년들에게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이용했다. 이처럼 그의 한족출정군인친족회의 설립은 전쟁 중인 미국사회에 한미간의 가교를 잇는 뜻 깊은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이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어 가자 1945년 4월 25일 50여개의 나라가 참가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회의(1945.4.25∼6.26)가 개최되었다. 전쟁 종결을 앞두고 열린 대규모 국제대회를 대비해 중경의 임시정부와 미주한인들은 대회 참가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은 중경 임정의 훈령에 의지하여 7명의 임정대표단을 조직했는데 선생을 임정대표단의 교제부장과 재정검사원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미주의 한인들도 스스로 해외한족대표단을 조직하였다. 샌프란시스코회의를 둘러싸고 한인 대표가 둘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임정대표단과 해외한족대표단은 합동을 추진하지만 이승만의 얄타밀약설유포 등의 문제로 인해 공동활동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때문에 임정대표단이나 해외한족대표단 모두 대외선전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없었다. 임정대표단에 합류한 선생의 활동영역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임정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을 정리하면서, ‘비록 참가권을 얻지 못했으나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우리 한인의 형편을 널리 선전한 것만은 성공한 것으로 본다’고 그 결과를 자평했다(<북미시보>, 1945.7.15). 그리고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유포에 대해 한인들끼리 비방하는 것은 민족의 수치라 하여 이승만을 적극 변호하였고 향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선생이 광복직전 임정대표단에 합류해 이승만을 도와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한 일은 필생의 숙원인 한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마지막 헌신이었다.

한미협약 초안 작성 도중 세상을 떠나다

광복 후, 1949년 3월 14일 선생은 고국을 떠난 지 4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한 그는 종군목사로서 조용히 활동하기를 희망했으나 이승만은 선생을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이라는 중책에 임명해 자신의 정치활동을 돕도록 했다. 이승만은 선생으로 하여금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해외 한인들을 격려하고 중남미의 각국을 비롯해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한 유엔의 48개국 우방국을 방문해 감사하는 친선외교를 부탁했다. 이런 막중한 책임을 맡은 것 외에 선생은 한미 간에 새로운 협약이 필요함을 깨닫고 한미협약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밤새도록 이 한미협약의 초안을 작성하다 6월 20일 아침 갑자기 쓰러진 뒤 그 날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갑작스런 죽음은 한국정부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장례는 1949년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로 치러졌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러한 애도는 일생을 한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해 왔던 선생이 신생 대한민국정부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역량을 다 바친 삶에 대한 온 국민의 슬픔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병구 이미지 2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0.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