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 열사, 1926년 12월 28일 경성 시내에서 일본 경찰들의 포위망 속에 홀로 격전을 치르며 외친 유언
“저희들은 조국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나석주(羅錫疇, 1892.2.4~1926.12.28) 열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에서 아버지 나병헌(羅秉獻)과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서북지방 책임자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설립한 양산(楊山)학교가 있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소년 석주는 양산학교를 거치며, 몸과 마음이 굳센 독립투사로 다져진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이 지방까지 번지면서부터 청년이 된 나석주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활동을 시작한다.
3월 하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의 집에 6인조 권총강도단이 들었다. 이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도답지 않게 모두 최 부자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최 부자도 그제서야 좌정을 하고 냉정을 찾았다. 그때 한 복면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일반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말뜻을 알아차린 최 부자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오히려 6인조 강도들이 불안한 눈치를 보였다.
“너, 석주로구나! 그 복면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 춘부장 어른께서도 편안 하신가?”
깜짝 놀란 석주는 복면을 벗고 최 부자 앞에 조아렸다. 나머지 다섯 명도 얼굴을 드러냈다. 김덕영(金德永), 최호준(崔皓俊), 최세욱(崔世郁),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가 그들이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이 것밖에 없으니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나!”
최 부자가 ‘강도들’에게 내놓은 돈은 무려 630원(圓)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6인조는 크게 감동하여 큰 절을 드린 다음, 인사를 올렸다.
“저희들이 떠나고 나면 즉시 일경에 연락하여 권총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 일경이 눈치 채면 봉변을 당하십니다”
6인조 강도단은 4월에도 다시 황해도 안악(安岳)군의 부호들인 김응석(金應石), 원형락(元炯洛)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그 활동이 신출귀몰하였다. 수사망이 좁혀오기 시작하자 나석주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20년 11월 22일이었다. ‘6인조 연쇄강도사건’은 영구미제(永久未濟)로 남았다.
나석주 열사가 김구 선생에게 보낸 편지. 나석주 열사가 북경에서 인편을 통해 상해에 있던 김구 선생에게 보낸 서한으로 선생의 안부를 묻고 계획 중인 일이 완전히 준비되지는 않았으나 조만간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지 못한다.”
나석주는 상해에서 은사인 백범을 다시 만난다. 당시 백범은 임시정부 경무국장(警務局長). 이때부터 나석주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원․의정원(議政院) 근무와 함께 한인애국단․의열단 가입으로 폭파 활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이동휘(李東輝)가 세운 무관학교 등에서 전략전술을 연마했다. 1926년 나석주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명한 독립운동가인 김창숙(金昌淑)과의 만남이었다. 그 해 5월 김창숙과 김구는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함께 모색했다.
이들 두 거두(巨頭)는 ‘지금 무엇인가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지 못한다. 이때에 일정기관(日政機關)과 친일부호(親日富豪)를 박멸하여 국내 동포의 잠자는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방략(方略)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를 실행할 인물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 김구가 먼저 제의를 했다.
“나와 친한 결사대원으로 나석주, 이화익과 같은 용감한 청년이 지금 천진(天津)에 있다. 또 그곳에는 의열단원도 많으니 무기를 구입, 천진으로 가서 기회를 보는 것이 좋겠다.”
김창숙은 두 명의 조선 청년을 만났다. 그리고 계획을 설명했다. 둘은 거침없이 나섰다.
“우리들은 일찍이 한번 죽기로 결심했는데,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나석주로 결정이 되었다. 이화익은 섭섭한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 김창숙이 말했다.
“백범도 그대의 장도(壯途)를 학수고대하고 있소.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과 동양척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위해 무운(武運)을 비는 바이오”
‘중국 산동성 출신. 나이 35세. 이름 마중덕(馬中德)’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에 상륙한 이 중국인은 다름 아닌 나석주였다. 마중덕은 열차를 이용해 평안남도 진남포로 향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
조선식산은행 |
민족혼 일깨우려 단신으로 귀국하여 서울로…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고향을 떠날 때 한마디 이별의 말을 하지 못한 부모님과 부인, 아들․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향 길에서 그는 ‘일제의 삼엄한 경계가 고향 일대에 펼쳐져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된다. 나석주는 바로 발길을 서울로 돌렸다. 피눈물이 흘렀다. 1926년 12월 28일 중국인 전용여관 ‘동춘(同春)전’에 들었다. 날씨는 투명했으나, 조국의 겨울 바람은 차가웠다. 나석주는 아침밥을 든든하게 들었다. 그리고 낮이 될 때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오가는 동포들의 표정이 어두웠고, 슬프게 느껴졌다.
오후 2시 5분. 나석주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굉음(轟音)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뒷벽 기둥에 던져진 폭탄은 불발(不發)이었다. 절망적인 생각이 찰나에 스쳐 지나갔다. 폭탄을 입수할 때 시험을 하지 못한 점, 6개월간의 보관기관 중 뇌관에 녹이 슬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회한(悔恨)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다행히 일인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나석주는 태연하게 정문을 나섰다.
“그렇다면, 이젠 동척(東拓)이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 나석주 열사의 의거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지난해(1926년) 말 일어난 나석주 열사의 의거를 소개하기 위해 호외를 특별 발행했으며 ‘게재금지 금일해금’이라고 ‘동아일보’ 제호 밑에 설명하고 있다. “백주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 동척(동양척식회사)과 식은(신산은행)에 폭탄을 투척.
권총을 난사하야 일거에 7명 저격”이라고 큰 제목을 뽑았다. 전면을 모두 나석주 열사 소개에 할애했다.
“2천만 민중이여 분투하라.” 서울 을지로에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 끝에 장렬하게 자결
동척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나석주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1층에서 일본인 1명을 권총으로 사격하고, 2층으로 뛰어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에게 사격한 뒤 놀라 도망가는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 기술과장실에 나머지 폭탄 1개를 힘껏 던졌다. 쏜살같이 1층으로 뛰어내려오며 2명의 일본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거리로 나와 폭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게 또 웬일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이, 시야가 노랗게 변해갔다. 황금정(黃金町)(지금의 을지로1가) 쪽에서 달려온 경찰을 쏘아 쓰러뜨릴 때까지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황금정2정목에 이르렀을 때에는 일경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졌다. 나석주는 운집한 군중을 향해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는 3발을 쏘았다. 이어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격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나석주는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田畑唯次] 등을 사살한 후에 자신이 지녔던 총으로 자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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