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차리석(車利錫, 1881. 7. 27~1945. 9. 9)

문성식 2015. 8. 10. 03:14

차리석 찬 바람 이슬 속에 임시정부를 지키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48년 사회장 당시 이시영․김구 선생의 추모사 중에서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 교육을 시작하고 신민회에 가입

차리석 이미지 1

차리석(車利錫, 1881. 7. 27~1945. 9. 9) 선생은 1881년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차시헌(車始軒)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입환(徐立煥)이라 이름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00년에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1904년 5월 정규과정 첫 졸업생(차리석(車利錫), 노경오(盧敬五), 최광옥(崔光玉))이 되었으며, 졸업 후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을 통해 쓰러져 가는 국가를 지탱할 동량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한편, 안창호․양기탁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평양지회에서 활동하며 신민회의 공화주의 사상과 교육구국, 독립군 기지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익혀갔다.

당시 신민회는 교육기관의 설립, 만주에 독립군 기지 개척 등 국권회복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1911년경에는 이상룡(李相龍), 이시영(李始榮) 등 일부 인사들이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여 대일항전의 기반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뜻을 쫓아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하던 중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을 위하여 조작한 소위 사내총독(寺內總督) 암살기도 사건에 연루, 1911년 1월 일경에 피체되어 1913년 3월 20일 출옥하기까지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총독 암살 기도에 연루되어 옥고 치르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신문 기자로 일해

<임시의정원 소식>(독립신문 1923년 4월 4일자 기사 사본)
차리석이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된 사실을 알리는 기사.

그 후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선생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주 3회 발행되던 ≪독립신문≫(8월 간행 당시에는 ≪독립≫이란 제호를 사용함)의 기자로 항일광복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이 신문의 평기자로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만주독립군의 활동상, 임시정부의 힘찬 출발과 의욕적인 활동, 미주․노령 등지의 적극적인 지원 등을 취재 보도하여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하고 항일과 독립에의 열망을 북돋우는데 진력하였다.

1921년 6월에는 동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서 사장 김승학(金承學), 주필 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언론활동을 통해 임정을 구심점으로 항일투쟁을 결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민족적 열망을 담고 출범한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국내외 동포들의 지원과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와의 연계 등을 통해 대일항전의 구심체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1920년 국내 연통제 조직의 와해와 태평양 회의에 기대를 건 외교노선의 실패 등을 겪으면서 지도체제의 동요를 가져 왔고 1921년부터는 임정 존립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요구가 거세어졌다.

이때 선생은 이동녕․김구․이시영․조소앙․이동휘․조완구․김철 등 임시정부의 주도적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임시정부의 존폐문제를 다룰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논의로 어수선한 독립운동계에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지면을 통해 “임시정부의 내일은 곧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전진하고 대동 단결합시다”라고 파벌의 종식과 대동화합, 인화단결을 호소하였다. 1922년 2월에 그는 독립신문사를 떠나 직접 임시정부에 참여해서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에 선출되어 자신의 포부를 실천해 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선생이 무용론(無用論)이 대두될 정도로 약화일로에 있던 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논의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그 속에서 임시정부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임시정부를 근간으로 한 선생의 항일역정은 이후 1945년 8월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재건에 주력. 남경에 동명학원 세워 독립운동 인재 양성

<단우 입단에 관한 건>(1925.1.25)
동명학원 강의실에서 차리석의 주례로 흥사단 예비 단우 입단식을 거행하였다는 내용. 흥사단 원동임시위원장 대리 차리석의 명의로 작성되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도산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통한 임시정부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또한, 이동녕․김구․안창호․여운형 등 3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방략의 거중 조정에도 참여하였다. 시사책진회는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간의 이견을 조정하고 각 방면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하여 최선의 방책을 모색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선생의 노력은 분분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 만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같은 해,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에 가입하여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년인재의 양성에도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는 청년들의 공론(公論)을 도출하기 위하여 강론회를 수시로 개최하여 여러 가지 주제로 자유로이 강연과 토론을 진행, 단원 간에 방략과 의론을 합치시켜 나갔다. 원동위원부는 또한 미주 흥사단의 자금원조로 1924년 3월 남경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향학열에 불타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 온 청년들을 교육시켜 독립운동의 간성으로 키워 나갔다. 이 같은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 선생은 이사 등으로 재직하며 1945년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남경의 동명학원 설립은 인재양성을 통한 독립쟁취라는 선생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만큼 선생이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선생이 원동위원부에서 활동한 1922~1931년간은 임시정부 활동이 침체기였으나, 침체의 와중에서도 선생의 독립운동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사진(1941.3. 중국 중경) 제일 아랫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리석 순이다

임시의정원 부의장, 한국독립당 이사로 일제 탄압과 항일투쟁의 한가운데 서다

한편,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별적으로 분산되었던 독립운동세력을 재결집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곧, 좌․우파간의 민족협동전선을 형성하자는 움직임이 대두한 것이다. 이는 민족대당(民族大黨), 결성을 위한 준비로 나아갔고 임시정부 측에서도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1930년 초에 이동녕․안창호․이시영․김구 등이 상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였으며 선생도 이에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경제․교육상의 균등)를 기본이념으로 삼아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모든 인물과 농(農)․공(工)․상(商)․학계(學界)의 남녀노소를 총망라하여 국민적 기반 위에 조직할 것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으로서 임시정부를 유지․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창당되었다. 이 당은 기관지로 <<상해한문(上海韓聞)>>과 1934년 1월부터 <<震光(진광)>> 등을 발간하였는데, 선생은 <<상해한문(上海韓聞)>>의 편집 겸 인쇄를 맡아 당의 기본강령 실천에 진력하였다.

한국독립당은 또한 상해한인청년당(上海韓人靑年黨), 상해한인애국부인회(上海韓人愛國婦人會),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上海韓人女子靑年同盟), 상해한인소년동맹(上海韓人少年同盟) 등의 단체를 통해 상해지역 각계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적극화해 갔다. 즉, 이들 단체들이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적극적으로 지지․옹호하도록 하는 한편, 청년운동․부인운동․소년운동 등 독립운동 각 부문 활동가의 양성기관 및 전위단체로서 키워갔던 것이다. 이러한 독립운동자 양성 및 선전활동 외에도 1934년 3월 3일 일제가 홍구공원(虹口公園) 안에 있는 상해신사(上海神社)에서 상해사변 당시 전사한 군인들에 대한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할 때 한국독립당의 지시로 강병학(康秉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여 다시 한번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한국독립당에서 이사(理事)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 회의에서는 이동녕을 의장에, 선생을 부의장에 선출하여 한국독립당과 발맞추어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체제를 재정비한 임시정부는 1932년 1월 8일과 4월 29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작탄항일투쟁으로 인해 다시 한번 한국인의 기개를 온 세계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일대 장거에 따른 일제의 발악적 보복 검색으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의 요인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32년 5월에 임시정부는 14년 동안 머물렀던 상해를 떠나 항주(杭州)로 이동하게 되었다.

동암 차리석 선생 화갑 기념 촬영 사진(1941.9.중국 중경)

1932년 11월 28일 항주의 의정원 회의에서 선생은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렇게 선생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 또는 지원하면서 의정․행정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보기 드문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933년 3월의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내무장 겸 비서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시련은 계속되어 1935년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되자 국무위원들마저 임정을 떠나 자칫 임정의 와해를 막는 것이 목전의 급선무가 되었다. 이에 선생은 송병조와 함께 광동(廣東), 항주(杭州), 가흥(嘉興) 등지의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을 찾아 다니며 임시정부의 재건과 구심점으로서의 임무를 강조, 마침내 다시 합류하게 하는 등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35년 11월 13일 위기를 극복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여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때 주석에는 이동녕(李東寧), 내무장 조완구(趙琬九), 외무장 김구(金九), 재무장 송병조(宋秉祚), 군무장 조성환(曺成煥), 법무장 이시영(李始榮), 그리고 선생은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또한 신당운동에 참가했던 한국독립당이 민족혁명당의 창립과 함께 해체되어 임시정부의 여당이 없어졌으므로 새로운 여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립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창립선언서에서 “자에 오등은 국가주권의 완전한 광복에서 전민적(全民的) 정치․경제․교육 균등의 3대 원칙의 신앙을 확립하고 (중략) 더욱 성실․건전․영용의 비개인적 정신으로써 (중략) 적의 총 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 각국 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할 것을 선언한다”고 하여 삼균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당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한국독립당 당의(黨義)의 이론체계 초안(1942).
한국독립당이 선전용 책자로 발간한 이론 체계를 차리석이 알기 쉽도록 해설해 놓은 책자.

한국국민당 조직부장으로 헌신…한국독립당 집행위원으로 항일역량 결집

한국국민당은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 등의 외곽단체를 거느리며, <<한민(韓民)>> <<한청(韓靑)>> <<전선(前線)>> 등의 기관지와 각종의 선전 유인물을 간행하였다. 또한 1937년 7월 김영호(金英浩) 등 6명을 중국 화북지방에 파견하여 일제의 군사 및 일반 정보수집에 노력하고 이들에 의해 청년대원 일부를 국내에 침투케 하여 주요도시에서의 무장봉기, 일제의 요인 제거 등을 수행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조사원을 파견, 일제의 포진․병기․탄약․비행기․대포 등의 배치상황에 관한 정보를 수집, 중국 국민당 정부에 제공함으로써 중국 정부의 야간 폭격으로 일제에 다대한 타격을 주었다. 12월 중순에는 담당지역 내의 주요 관공서 시설파괴, 요인 처단 등을 임무로 하는 결사대 3대(隊)를 조직하여 제1분대는 만주, 제2분대는 국내, 제3분대는 일본에 파견하기로 하는 등 기관지의 국내배포, 일제요인, 친일주구배 처단, 관공서 파괴 대일군사정보 수집 등 특무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의 중심이던 한국국민당에서 선생은 조직부장을 맡아 헌신하였다. 1939년 5월에는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의 3당이 통합,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결성되자 집행위원에 선임되는 등 정당활동을 통한 항일역량의 결집에도 앞장섰다.

차리석 발인 사진(1945.9.12)

찬 바람 먹고 이슬 안고 잠든(風餐露宿) 세월…온갖 고초를 견디며 임정을 지키다

항주(杭州)의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하순 강소성 진강으로 이동하게 되어 2년 간의 진강 임시정부 시대에 들어갔다. 여기서 제4차 내각이 성립되어 1937년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군사정책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의 전세가 불리하자 중국정부는 중경(重慶)으로 천도하였고 임시정부도 부득이 장사(長沙)․유주(柳州), 기강 등지를 거쳐 1940년 중경(重慶)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임시정부 직할부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1945년까지 5년여 동안 각종 군사작전을 전개하게 됨으로써 임시정부는 명실공히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통수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생은 갖은 고초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켜왔던 장본인이었다. 선생은 중경 임시정부에서도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는 등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그 기쁨을 채 느끼기도 전인 그 해 9월 9일에 중경임시정부 청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그 뒤 김구의 자제 김신이 기강에 안장되어 있던 이동녕의 유해와 함께 선생의 유해를 모셔다가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원에 안장하였다. 1948년 사회장 당시 이시영․김구의 차리석 선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추모담을 통해서도 평생을 조국독립에 헌신한 선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