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6.jpg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회암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 1377년(우왕 3) 건립. 높이 3.06m, 너비 1.6m.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9037.jpg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비는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데, 비의 형식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것으로 개석이 없다.

1320년(충숙왕 7)에 태어나 1344년에 회암사에 입문하였다. 1348년에는 원나라에 가서 지공(指空)에게 법의·불자(拂子 : 번뇌를 물리치는 표지물)·범서를 받았다.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대사를 연도(燕都)의 광제사(廣濟寺)에 주거하게 하고, 금란가사와 폐백을 하사하였다.

또한,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왕이 가사와 불자를 하사하고 신광사(神光寺)에 주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구월산·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에 들어와 절을 크게 중수하고, 뒤에 1377년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을 행하였다. 후미에는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9038.jpg 이 비의 글씨는 예서로서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가 예서인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 당시는 중국에도 원(元)·명(明)을 통하여 예서가 쓰여지지 않을 때였으므로, 당시 우리 나라의 예서 또한 연구가 어느 정도였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데, 이 글씨는 상당히 예서를 연구한 면이 보인다.

≪동국금석평≫에는 나옹비는 “팔분서(八分書:예서 이분쯤과 전서 팔분쯤을 섞어 만든 한자의 글씨체)인데 태정(太整)하나 신채(神彩:훌륭한 풍채)가 없다.”고 평하였으나, 결구도 엄정하고 필력도 주경하며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 熹平石經〉을 방불하게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2.gif 교통안내

의정부에서 3번 국도를 3타고 동두천으로 향하다가 덕계동을 지나 덕정동에서 우회전- 56번 지방도를 타고 5킬로미터쯤 포천 방향으로 진행-회암사

12.gif 현지교통

의정부북부역 하차 후 30번, 902번 버스로 환승
* 30번(일반) 의정부 출발 ▷ 의정부 북부역 경유 ▷ 연대다리 하차
* 902번(좌석) 종로5가 출발 ▷ 수유역, 쌍문역, 의정부북부역 경유▷ 율정삼거리 하차

12.gif발굴자료관

09:00 ~ 18:00
* 11월~2월 - 09:00 ~ 17:00

12.gif현지숙박

에버그린관광호텔 031-855-0321 45 장흥면 www.evergreenhotel.co.kr
샬롬 유스호스텔 031-855-8011~2 24 장흥면

12.gif 주변관광지

 

12.gif 입 장 료

 

12.gif 주차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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