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여주군 북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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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
신륵사의 창건 사실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후기인 1726년에 작성된 『신륵사동대탑중수비(神勒寺東臺塔重修碑)』에 보면, "문헌에 이르기를 신륵사의 창건이 어느 때에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현릉(玄陵, 공민왕)의 왕사(王師) 나옹(懶翁)이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과 함께 놀았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유명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위의 기록으로 왕사 나옹과 목은 이색이 신륵사에서 함께 머물렀으며 이로 인하여 신륵사가 유명 사찰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보다 앞서 조선 초의 문신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그가 지은 『보은사기(報恩寺記)』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곧, 옛날 공민왕의 왕사 나옹과 목은 이색 선생 두 사람이 서로 이어와서 놀았다고 하면서 절이 드디어 기좌(畿左, 경기도 서부)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하여 나옹 선사가 신륵사에서 머무른 사실과 그로 인하여 신륵사가 경기도의 대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나옹 선사와 함께 신륵사에 머물렀다는 이색 자신이 지은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에서 강월헌(江月軒, 나옹의 호)은 보제(普濟)가 거처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나옹과 함에 신륵사에서 노닐었다는 이색인데, 다음과 같은 그의 시를 통해서도 이색이 신륵사에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다.
먼 산은 긴 강이요
성긴 소나무는 푸른 돌 곁이로세
절은 복된 땅에 열렸고
보제(普濟)는 진당(眞堂)이 열렸네
현령은 자주 허리에 홀(笏)을 꽂고 예배하는데
산 승(僧)은 홀로 벽을 향하고 있네
어쩌면 들 배를 불러서 맑은 휘파람으로
넓고 아득한 물에 띄울꼬
더욱이 이색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와 『보제존자선각탑명』의 두 기록에서 나옹의 일을 적었다. 또한 신륵사가 있는 천송리에 붙어 있는 금당천 하구의 가정리는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李穀, 1298~1351)이 유배됐던 곳이다. 『보제존자석종비』에는 이색이 천령(川寧)에 있는 염정당(廉政堂)에 있으면서 절에 왕래하였다고 하였다.
이색과 나옹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둘이 서로 교류했었던 것이 아니라, 이색이 1377년 왕명으로 나옹의 탑비명을 쓰게 되면서부터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신륵사 나옹 선사의 제자 학주(學珠)가 나옹의 석종기문을 부탁했을 때 이색이 흔연히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들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반드시 거절하지 못할 것이며 보제의 몸이 이미 화장을 했음에도 보제가 살아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보제께서 크게 도를 펴던 곳으로 장차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상에서 나옹 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함으로써 비로서 절이 대찰을 이루었다는데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여 보았다. 곧, 나옹이 입적하기 이전부터 신륵사와 관련을 맺음으로써 더욱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공민왕 이후 태고 보우(普愚)와 더불어 고려 선불교를 중흥시켰던 나옹 혜근(慧勤, 1320∼1376)은 1371년(공민왕 20)에 왕사가 되었다. 『고려사』 권133 「열전」 1 <신우(臣禑)>조를 보면 나옹은 잠시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가 되어 회암사를 중수하여 1376년에 낙성회인 문수회(文殊會)를 열었으나 전국의 무녀(巫女)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혼잡을 빚은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받아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로 추방되어 가는 길에 여흥(驪興)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옹의 탑비에는 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색이 지은 『회암사선각왕사나옹부도비』와 『신륵사보제존자시선각탑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전략)…이리하여 명을 내려 영원사에 이주하게 되어 급히 길에 올랐다. 선사는 이 때 마침 병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삼문(三門)을 지나서 못가에 이르니 인도하는 자가 열반문으로 해서 가라고 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의심스럽게 여기고 소리쳐 울었다. 선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힘 쓰라! 힘 쓰라! 나로 인해서 중단하지 말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에서 그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簽)에게 이르기를, "내 병이 심하니 배를 타고 가도록 해 다오." 했다. 이에 강을 거슬러 7일 동안을 올라가 바야흐로 여흥에 다다랐다. 이 때 또 탁첨에게 이르기를, "조금 머물렀다가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서 가도록 하자." 하니 탁첨도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 이래서 여흥 신륵사에 우거했다. 5월 15일에 탁첨은 다시 길을 떠나자고 재촉했다.
선사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의당 갈 것이다." 하고 이날 진시(辰時)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보제존자사리석종기』에 의하면 나옹이 입적한 후에 영이(靈異)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신륵사에서는 제자들이 나옹선사가 입적한 지 3개월이 지나 신륵사 북쪽에 사리석종부도를 세웠다. 여기 에는 나옹선사의 제자였던 각주(覺珠)·각성(覺惺) 등이 중심이 되어 100여 명의 시주자가 참여하였다. 각주 스님이 이색에게 청하여 『보제존자사리석종기』를 짓게 하고 각산 스님이 비를 세울 좋은 돌을 구해서 석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석종기 뒷면의 중창연화문생명목(重創緣化門生名目)에 따르면 이 무렵 대중창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대전(大殿), 조당(祖堂), 승당(僧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 향적당(香積堂) 등이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화상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이 건립되었다.
이색이 지은 『신륵사선각진당시(神勒寺禪覺眞堂詩)』에는 신륵사의나옹선사의 제자 지선(志先)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이 오탁(五濁)의 악한 세상에 태어나서 일하셨으니 이런 까닭에 회암사(檜岩寺)는 옛날의 기림(祇林)과 같고 신륵사는 옛날의 쌍림(雙林)과 같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당에 걸 시를 이색에게 청하였다. 나옹선사의 제자였던 지선은 이색에게 나옹화상석종기문을 짓도록 부탁한 바 있다. 나옹선사의 선각진당을 짓고 선사의 진영을 모셔 아래와 같은 시를 걸어 놓았다.
도(道)의 현묘한 것은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닐세
아! 아! 저 화상은 딴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늠연(凜然)한 그 모습 하늘이 만든 것처럼 빼어났네
여기에 와서 절하는 자 있으면 마치 그 목소리 듣는 것 같으리
나옹선사의 입적을 전후하여 신륵사에는 건물이 새로 지어지는 등 사세(寺勢)가 확장되어갔는데 나옹선사가 입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을 건립하고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1383년(우왕 9)에 고려 말기 운신으로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었던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9∼1392)이 지은 『신륵사대장각비(神勒寺大藏閣婢)』에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전략)…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탑명을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스스로 계획하여 보니 내 힘으로는 부족하다. 힘을 기울여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옹의 무리들뿐이다. 즉시 편지를 보내서 의사를 말하였다. 호를 무급(無及)이라 하고 또 수봉(琇峯)이라고 하는 두 승려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격려하였다. 경신년(1380년) 2월부터 인연을 따라 찬조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각참(覺?)은 순흥에서, 각잠(覺岑)은 안동에서, 각홍(覺洪)은 영해에서, 도혜(道惠)는 청주에서, 해주(海珠)는 충주에서, 각운(覺雲)은 평양에서, 범웅(梵雄)은 봉주에서, 지보(志寶)는 아주에서 시주를 하였다. 닥나무를 종이로 만들었고 검은 것을 녹여 음식을 만들었다. 신유년(1381년) 4월에 이르러 경률론(經律論)을 인쇄하고 9월에 표지를 꾸미고 10월에 각주(覺珠)가 금가루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縫)이 표지를 만들었으며 11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몇 되 몇 말의 곡식을 빌려다가 여러 스님들의 밥먹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던 자가 국신리에 사는 노파 묘안(妙安)이었다. 임술년(1392년) 정월에 화엄종 영흥사에서 거듭 교열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군 신륵사에 이르니 나옹이 입적한 곳이다. 화산군(花山君) 권희(權僖)가 제목을 주관하여 다시 여러 시주들과 더불어 시주하고 동암(同庵) 순공(順公)이 감독하여 드디어 절 남쪽에 2층집을 짓고 크게 단청 장식하였다. 절을 짓고서 그 안에 넣어 간직하였다 5월에 전경(轉經)하고 9월에 전경하였으며 금년 들어 계해(1393년)에 또 전경하였다. 대략 1년에 세 번 항규(恒規)로 삼는다.…
위에서 원문을 인용하였는데 본래 신륵사에 대장경을 봉안하고자 했던 인물은 이색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2)이다. 고려 말 경학의 대가로서 중국에 문장을 떨쳤던 이곡은 부모를 위하여 대장경을 이룩하겠다는 서원을 한 바 있었다. 그리고 유배 때 신륵사 가까이에 있는 가정리에 머무르면서 신륵사에 왕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아버지의 서원을 자식인 이색이 중국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상총(尙聰) 스님으로부터 부친의 서원을 듣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곡이 서원을 세운 지 30여 년만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문의 뒷면에는 위에서 말한 전국 주요 지방에서 시주한 승려 이외에도 각운(覺雲), 신조(神照), 자초(自楚) 등 유명한 고승과 최영(崔營), 조민수(曹敏修), 최무선(崔茂宣), 염흥방(廉興邦)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이 보이고 있다. 이는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이 서원을 세워서 한 개인적인 불사이기 보다 국가나 왕실에 의한 불사가 아니었는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런데 신륵사에서 인출한 대장경은 개성 오관산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을 하였다고 한다. 영통사는 고려 때 창건되어 인종을 비롯하여 영종, 신종, 충렬왕, 충선왕, 공민왕 등의 참배를 받은 사찰로 왕들의 진영까지 모셔 놓기도 하였던 사찰이다.
〔조선시대〕
대장경의 봉안
조선시대에 시행된 배불정책으로 인하여 신륵사도 크게 위축이 되었을 듯하다. 조선시대 신륵사에 관한 첫 기록은 신륵사에서 대장경을 인출하였던 이색이 신륵사에서 죽은 일이다. 이색은 1392년 5월 병으로 신륵사에서 죽었다. 이색이 신륵사에 나옹선사의 탑비를 지은 것이나 대장경 인출 불사는 당시 배불숭유의 유가로부터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배척상황은 신륵사에서도 있게 되는데 그것은 태종이 신륵사의 대장경 전부를 일본국왕에게 보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1401년(태종 1)에 일본 국왕이 대장경판을 구하러 사람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논의가 되었던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대장경을 일본국에 보내고 「대반야경(大盤若經)」 을 규주(圭籌)에게 내려준 기록이 상세히 보인다.
처음에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일본이 대장경을 구하니 경판을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 경판이 적지 않으니 보내준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경외 경판의 숫자를 헤아려서 알리도록 하라" 고 논의를 하였다. (태종실록」권28 태종 14년 7월 11일)
또한 일본에서 대장경을 청하자 경판을 보낸다면 다시 오지 않을까 두려워 경을 주지 않고 종을 폐사하여 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곧 신륵사와 충청도 천안군 풍세 광덕사(廣德寺)에 봉안된 대장경을 일본 사신인 승려 규주 등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태종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규주는, "우리(일본) 왕이 선군의 뜻을 이어 대장경과 대반야경을 열람하고자 합니다. 신이 받아서 우리 왕에게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고, 이어서 대반야경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 경은 우리나라에도 또한 희소하다. 널리 구해야 내려줄 수 있다." 하고는 예조에 명하여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일본국왕에게 보내고 광덕사에 소장된 대반야경 전부를 규주에게 내려주게 하였다. 규주 등은 대반야경을 구하여 이미 받았는데 오히려 만족하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광덕사는 현재 천안시 광덕면 공덕리 화산에 있는 사찰인데 이 절의 대반야경과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주었던 것이다.
세종의 능침사찰
1440년(세종 22) 신륵사를 중수하였다.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면서 태종의 장인으로서 태종이 왕에 등극하기 전의 사부였던 어은(漁隱)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 1339~1408)의 영정을 신륵사에 두었던 것으로 인해서였다. 당시 신륵사의 어떤 건물을 어느 정도 중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세종은 신륵사를 중수한 지 7년 후인 1447년에, "여흥 신륵사에는 문도공(文度公)의 영정을 모셨는데 의지 없는 잡된 승려들이 잘 수호하지 못하여 형편없이 되었다기에 이제 전라도 장성 백양사의 승려 학몽(學夢)을 들어가 살게 하였으니 잘 접대하여 주어라." 는 명을 내렸다(세종실록 권117 세종29년 7월 9일).
여흥부원군 민제는 시호가 문도(文度)로 그의 집안은 고려후기 권문세족으로 태종대에 이르러서는 민제의 두 아들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의 형제가 외척 제거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고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대사찰로 일신하게 된다. 영릉은 본래 광주 대모산(大母山)에 있었는데 예종(1468∼1469)이 즉위하면서 풍수지리상으로 지세가 불길하다고 하여 1469년(예종 2) 세종대왕과 그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을 여주 영릉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보은사기(報恩寺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성화(成化) 5년 기축(己丑, 1469)에 세종 재궁(梓宮)을 여주에 옮겨 능사지내는 일이 끝나자 대왕대비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선왕께서 부왕을 꿈에 보시고 장차 영릉 밑에 절을 세우려 하시었으나 갑자기 승하하시어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셨으므로 절을 경영할 겨를이 없었더니, 이제 선왕이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들이 빨리 유지(遺志)를 거행하지 않으면 어찌 장차 선왕을 지하에서 뵈올 것인가." 하였다. 곧 한명회(韓明會)와 한계희(韓繼禧) 등에게 명하여 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을 세울 만한 곳을 택하게 하였다.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능의 경내에는 절을 세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 신륵사는 일명 벽절로 옛 현인들이 놀던 자취가 완연하고, 또 선왕의 능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종과 북소리가 들릴 만하옵니다. 만일 이것을 수리하면 옛것을 새롭게 만드는데 일은 반절이고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니 이보다 편리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의 능인 영릉 옆에 원찰로서 절을 짓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신륵사를 중수하고 원찰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명회?한계희를 제조(提調)로 삼고 여주목사 이신효(李愼孝), 원주목사 김춘경(金春卿), 내시부상선(內侍府尙膳) 이지효(李智孝)를 감역관(監役官)으로 삼아 1472년(성종 3) 2월부터 10월까지 200여 칸의 건물을 신축하였고 그밖에 종?북에서 일용품까지 모두 새로 만드는 대불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의 중창으로 우리 국가는 억만년의 가히 없는 기업을 열었으며 이에 부(府)가 승격하여 주(州)가 되고 절도 일신되었다고 한다.
신륵사를 중수한 이듬해인 1473년(성종 4)에 정희왕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 고치고 호조에게 명을 내려 보련사(寶連寺) 토지 140결과 삼각산 장의사(藏義寺) 토지 100결을 신륵사에 보시하였다. 이것은 1424년(세종 6) 4월 전국의 사찰을 36개 선·교종사찰로 삼았을 때, 비록 신륵사가 36개의 사찰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1개의 사찰이 받은 토지는 평균 220결이고, 선?교종의 중심사찰이 각기 250결의 토지를 받은 것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음을 알게 해준다. 조선 중종 때에는 청계사?용문사와 더불어 신륵사의 승려들을 장인(匠人)에 종사시키는 것을 혁파하자는 간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륵사를 보은사로 개명한 정희왕후(貞喜王后, 1418∼1483)는 세조의 왕비로 예종(1468∼1469)이 어린 나이인 14세에 왕위에 오르자 7년 동안 섭정을 하였다. 정희왕후는 신륵사를 짓는데 백성의 노고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불경간행을 위해 두었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없애고 여기서 사용하던 전곡으로 충당하게 하였다. 노는 사람에게 역사시켜 보수를 주게 하고 혹시라도 폐가 없도록 명을 내렸다.
조선 중후기의 신륵사
중종 때도 절의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때마침 황해도 지방에 가뭄과 흉년이 해마다 들어 공사의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가 있었다. 이 때의 일을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신륵사를 중수한다는데 요새 가뭄이라 흉년이 해마다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득이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륵사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승려의 횡포가 저렇게 심한데 더구나 먼 지방의 주, 군에 있어서야 금령에도 해이한 판에 무엇을 꺼려 난동을 부리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을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앞으로 대낮에 대도시 중심가에서 강탈·살인하는 변란이 일어난다 해도 끝내 막지 못할 것입니다.(중종실록 권88 중종 33년 9월 19일조)
이러한 형세는 호남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전국적인 승려들의 저항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배불의 상황에서 신륵사는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많이 남아있는 신륵사와 여강을 찬미한 시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적이 여주에 이르자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가 신륵사에 군사를 주둔시켜 뱃길을 끊고 적이 건너가지 못하게 했던 사실(연려실기술(練藜 室記述) 권15 ?선조조고사본말?조) 등은 신륵사의 지리적위치때문이었다.
또한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신륵사는 유생들이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니, 성현(成俔, 1439~1504)의 수필집인 용재총화(?齋叢話) 권9에는 젊은이들이 여흥 신륵사에서 글을 읽고 학업에 게을리 하지 않다가 서울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1671년(현종 12)에 계헌(戒軒) 대사가 중수하였는데,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서 1702년(숙종 28)에 오대산 승려 위학(偉學)이 천심(天心)?우안(宇眼) 등과 시주하여 중수하였다. 1725년(영조 1)에는 법밀(法密)·영순(英淳) 등이 동대탑(東臺塔)을 중수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공명승첩(空名僧帖) 250장으로 금강산 표훈사와 신륵사를 보수하도록 했다. 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에 의하면 이때 주지 도간(道侃) 등이 범중루(泛中樓) 12칸과 좌우 식간(食間)을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호조판서 김병기(金炳驥)에게 명하여 장불전(藏佛殿), 선료(禪寮), 종루(鍾樓), 향주(香廚)를 중수하도록 하였다.
〔중 창〕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보물 제229호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1호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神勒寺普濟尊者石鐘앞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신륵사극락보전(神勒寺極樂寶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여주신륵사팔각원당형석조부도(驪州神勒寺八角圓堂形石造浮屠)
〔사찰풍경〕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여강(麗江)이 몸을 풀어 은빛 모래밭을 빚고 기름진 옥토를 빚어 건설한 낙토(樂土)가 여주라했다. 그 여주에 여덟가지 자랑이 있는데 그 하나가 신륵모종으로 신륵사에서 울려펴지는 저녁 종소리를 으뜸으로 꼽는다. 신륵사 천년고찰의 향기가 하도 유장하고 천년역사의 성세가 하도 우람해 범종소리만으로도 낙토를 넉히 장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그 모습이야 얼마나 그윽하겠는가.
신륵사는 고찰로는 유일하게 강가에 위치한 명찰이다. 극락보전으로 바라보면 울울한 산세가 시야를 가리고 일주문으로 돌아서면 도도한 강물로 사바세계가 아득해진다. 그 모습이 얼마나 환희로웠으면 숭유억불 조선시대의 문인 김병익은 "신륵사의 아름다움을 어찌 유학자라 하여 폐할 것인가"하며 찬탄했다. 대장경을 인출하고 나옹선사의 선풍이 오롯이 깃들어있는 가람과 강물에 발을 담그고 유영하듯 유형무형 문화재를 따라 포행하노라면 아미타부처님이 전하는 정토 그 낙토를 쉬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창건설화〕 1)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영동선 여주행 동부고속버스 현지교통 경부,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여주톨게이트 ⇒ 우회전(37번국도이용) ⇒ 4㎞직진후터미널사거리에서우회전 ⇒ 1.5㎞ 직진후 여주대교 ⇒ 여주대교 건너서 곧바로 우회전 ⇒ 신륵사(여주톨게이트에서 신륵사매표소까지 7㎞) 개장시간 : 일출후부터 일몰시까지 (연중무휴) 이용시설 : 주차장(500대), 공원시설, 유료 뱃놀이 시설 주변관광지 영월루, 세종대왕릉, 명성황후생가, 고달사지, 목아불교박물관 입 장 료 개인 - 어른 2,000원 / 청소년,중고생 1,500원 / 초등학생 1,000원 주차시설
교통안내
* 첫차06시30분부터(30-40분 간격 1시간10분소요)
2) 동서울터미널에서 여주행 직행버스
* 첫차07시30분부터(1시간 간격 1시간30분소요)
단체 - 어른 1,500원 / 청소년,중고생 1,300원 / 초등학생 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