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의 송림(松林) 속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으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각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이것은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로,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구조의 호석(護石)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 한단계 발전한 것이며,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재위(在位) 514-540)은 본명이 원종(原宗)이며, 지증왕(智證王)의 아들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재위기간인 서기 520년에 관리들의 복장을 법률로 정했고, 521년에는 중국 양(梁)나라와 통교했으며,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금관국(金官國)을 점령하였다. 특히 528년에는 불교(佛敎)를 국교로 수용하여 신라(新羅)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기틀을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재위 27년만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법흥(法興) 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법흥왕릉(法興王陵)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법흥왕릉 남쪽에 신라(新羅) 하대(下代)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데 이를 애공사지탑(哀公寺址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릉(法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선도산 동쪽 기슭 무열왕릉 뒤편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