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9.jpg 신라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국 동북 1,000리 지점에 다파나국의 왕비가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는 금관국(김해)에 닿았으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아무도 거두지 않았고 다시 진한의 아진포에 닿았는데 노파가 거두어 키웠다. 궤짝이 떠오를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를 떼고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昔)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씨 왕이 되었다.

경주 시가지 서북방 표암(瓢巖) 근처에 위치하며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릉(陵) 전면(前面)은 평지이지만 후면(後面)은 얕은 경사를 이루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4.3m, 높이 4.5m이다. 봉분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으며, 호석(護石)을 설치했던 흔적도 외형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봉분의 전면에 놓여 있는 상석(床石)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신라 제4대 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金)(재위(在位) 57-80)은 석씨(昔氏)로 토해이사금(吐解尼師金)이라고도 하며,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유리왕(琉璃王)의 유언에 따라 62세에 왕이 되었는데 난생설화(卵生說話)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본래 왜국(倭國) 동북 1천여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으로 그 나라 왕비(王妃)가 알을 낳으니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 금관국(김해)(金官國(金海))에 닿았으나 아무도 거두지 않았다. 계속 표류하던 궤는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닿았고, 한 노파가 거두어 키웠는데 처음 궤짝이 떠올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를 떼어버리고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어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그가 자라서 석(昔)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의 석씨 왕(昔氏 王)이 되었다. 기록에는 재위 24년에 왕이 돌아가니 성(城) 북쪽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또는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고도 하였으나 양정구(壤井丘)나 소천구(疏川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에서 탈해왕(脫解王) 시기에 이와 같은 봉토분(封土墳)은 출현하지 않았으며 그 위치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