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에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 서북쪽에 위치한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m, 높이 5.8m이다.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 몇 개만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護石)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재위(在位) 540-576)은 본명이 삼맥종(三麥宗)(심맥부(深麥夫))이며, 법흥왕(法興王)의 아우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로서 왕비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진흥왕은 신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할 정도로 불교(佛敎)에 의지하였다. 재위기간인 서기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553년에는 황룡사(皇龍寺)를 창건하였다. 또한 551년에는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지대를 점령하여 그곳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고 555년에 북한산(北漢山)을 순시한 후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건립하였다. 년호(年號)도 551년에 개국(開國), 568년에 대창(大昌), 572년에 홍제(鴻濟)라 바꾸면서 신라의 독자성을 표시하였다. 또한 576년에는 화랑(花郞)의 전신인 원화(源花)를 만들어 화랑으로 계승하게 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576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흥왕릉(眞興王陵)은 법흥왕릉(法興王陵)과 함께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있었다는 것인데, 현재 전하고 있는 법흥왕릉(法興王陵)과 진흥왕릉(眞興王陵)은 선도산(仙桃山)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편에 2㎞ 이상 떨어져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릉(陵)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규모도 너무 작은 편이다. 따라서 진흥왕릉(眞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무열왕릉(武烈王陵) 뒤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위에서 두 번째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