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3.jpg 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의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6m, 높이 5.5m 규모이다. 봉분(封墳)의 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제25대로 중고시기(中古時期)의 왕이고 문성왕(文聖王)은 제46대로, 하대(下代)의 왕으로 두 왕은 계보(系譜)도 다르고 재위시기에도 3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데, 그 왕릉(王陵)들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규모 또한 왕릉(王陵)으로 보기엔 작은 편이다. 진지왕(眞智王)(재위(在位) 576-579)은 본명이 김사윤(金舍輪)(혹은 김윤(金輪))으로 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재위 기간이 짧아 치적은 거의 없으나 중국의 진(陳)나라와 통교한 기사가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9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지왕릉(眞智王陵)이 애공사(哀公寺) 북(北)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릉(陵) 아래편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그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왕은 무열왕(武烈王)의 조부(祖父)로서 무열왕릉(武烈王陵) 뒤편에 도열한 4기(基)의 대형 고분 중 위에서 3번째 고분을 그의 릉(陵)으로, 그리고 그 아래 4번째 고분을 그의 아들이자 무열왕(武烈王)의 부(父)인 문흥대왕(文興大王)(용춘일추존(龍春一追尊))의 릉(陵)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문성왕(文聖王)(재위(在位) 839-857)은 본명이 김경응(金慶膺)이고, 신무왕(神武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57년에 9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공작지(孔雀趾)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다음 왕인 헌안왕(憲安王)의 장지도 공작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