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1.jpg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서악)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높이는 본존 6.85m, 우협시보살 4.62m, 좌협시보살 4.55m.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돌출된 암면에 거대한 본존을 조각하고, 좌우의 협시보살은 별도로 원각(圓刻)하여 배치하였다.

본존은 암벽의 파손 때문에 머리와 신체 각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는데, 특히 얼굴의 손상이 심하여 눈 이상의 얼굴과 머리는 모두 탈락해 버렸다. 코는 큼직하며 입은 꽉 다물었고, 턱은 날카로워 박력 있는 윤곽과 함께 힘이 충만한데, 고졸한 미소가 남아 있다.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가 잘 나타나지 않았으며, 목에서 내려온 어깨선은 둥글어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 국보 제199호)과 비슷하지만, 어깨를 움츠린 것은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국보 제109호)의 본존과 유사하다.

신체는 양감이 거의 없이 그냥 원통형으로 되었으며, 이것은 장대한 체구,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의 수인과 함께 부처의 위엄과 힘을 나타내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가슴 부근에서 탈락이 심하여 확실한 옷자락 무늬는 알 수 없지만, U자형의 옷주름이 가슴 부근부터 성글게 표현되고 있다.

 

협시보살은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아래 계곡에 굴러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왼쪽 협시보살은 대좌까지 모두 4개로 분리되어 있던 것으로, 머리 부분은 목까지 남아 있는데,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化佛)이 조각된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며 윤곽선이 부드럽고 적당히 살이 쪄서 복스럽고 우아한 얼굴이다. 눈은 가늘고, 코는 큼직하고 시원스러우며, 입술은 살짝 다물었는데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본존불에 비하여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편으로, 상체는 굴곡도 잘 나타나 있다.

 

왼손은 내려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이 인상(印相)과 보관의 화불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양팔에는 천의(天衣)가 휘감겨 있으며, 여기서 내려온 3단의 옷주름이 다리 상단과 하단에 각각 걸치고 있어, 군위삼존석굴의 관음상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졌다.

 

대좌는 원통형의 돌을 앞부분만 파서 여기에 몸의 무릎 이상까지 낄 수 있도록 한 특수한 것으로서, 표면에는 옷자락 무늬를 표현하고, 발 아래는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 : 겹꽃잎의 연꽃무늬)을 복련(覆蓮 :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으로 조각하였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5개의 조각으로 절단된 것으로서, 현재는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왼쪽 보살보다 훨씬 파괴가 심하나 전체 높이는 비슷하다. 얼굴은 왼쪽 보살과 비슷하지만, 직사각형에 가까운데다 눈도 바로 뜨는 등 보다 남성적인 기풍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코끝이 다소 마멸되었다. 신체도 왼쪽 보살과 거의 같으며 목걸이·옷주름도 비슷한데, 관음보살인 왼쪽 보살에 대하여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이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7세기 후반∼8세기 초)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형태면에서는 기념비적인 양감을 느낄 수가 있는데, 원통형의 체구라든가 어깨가 좀 움츠러든 것 등은 군위삼존석굴의 본존과 흡사하며, 또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도 비슷하다.

 

선의 표현에서 본존의 각선(刻線)은 명확하고 힘 있게 표현되었으며, 법의의 U자형 옷주름 선은 경주배리석불입상(보물 제63호)의 옷자락처럼 장중하고 묵직하게 처리되었다. 그 밖에 보살의 천의 주름은 군위삼존석굴 보살상의 천의와 비슷한, 부드러우면서도 생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마애석불상은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과 친연성을 가지면서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군위삼존석굴의 불상 수법이 나타나고, 경주배리석불입상과도 작풍을 같이하는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이라고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