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48.jpg 경상북도 안동시 운흥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높이 8.35m.

 

후세의 보수로 인하여 기단부가 상당히 변형된 듯하나, 현재는 높이 약 42㎝의 화강석 3단을 쌓아 기단을 삼았다.

탑신부(塔身部)부터는 27.5×12.5㎝에 두께 6㎝의 무문전(無文塼:문양이 없는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옥신부(屋身部)에는 우주형(隅柱形)의 표현이 없고 옥개부(屋蓋部)의 처마 너비는 좁아졌다.

 

옥신에는 각 층에 감실(龕室)이 개설되었는데, 초층 남면에는 높이 47㎝, 너비 55㎝의 테두리를 화강석으로 만들어 감실을 삼았고, 2층의 4면과 3층의 남면에는 높이가 전재(塼材) 2매 두께인 형식적인 감실이 개설되었는데, 특히 2층 남면에는 2구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한 화강판석을 끼우는 이례적인 표현을 하였다.

 

옥개부의 받침수는 초층부터 10단·8단·6단·4단·3단으로 체감되었고 낙수면에는 처마 끝에 목제의 연함(椽檻 : 암키와의 뒷면에 있는 골을 파서 평고대 위에 박아 대어 처마 끝 암키와를 받는 재)을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혔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연화가 조각된 복발형(覆鉢形) 석재가 얹혀져 있다.

 

감실인왕상 이 전탑은 ≪동국여지승람≫이나 ≪영가지 永嘉誌≫에 기록된 법림사전탑(法林寺塼塔)으로 추정되며 가까운 거리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전하고 있으나 사지(寺址)는 안동역 구내에 편입되었다.

 

≪영가지≫에는 법림사전탑이 7층이라는 점,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는 점, 상륜부는 법흥사탑(法興寺塔)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만력(萬曆) 무술(戊戌)인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현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추정된다.

 

안동지방에는 특히 전탑이 다수 전하고 있으며, 기록에 보이는 전탑까지 합하면 10여개에 달하고 있음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한편, 안동과 인접한 지역에서 모전석탑(模塼石塔)이 다수 건립되었음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