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
 
이 집은 안채의 상량문(上樑文)에 의해 1892년(숭정(崇禎) 기원후 오임진(五壬辰))이라는 정확한 건축년도를 알 수 있는 바 아마 사랑채도 같은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머지 문간채와 광채 등은 모두 20세기 초에 건축되었다.

넓은 공터를 지나 동쪽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3간 바깥대문채와 그 옆에 나란히 5간 사랑채가 동으로 틀어서 동남향한다. 그 앞에 그리 크지 않은 사랑마당이 마련되고 맞은편에 커다란 회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쪽으로 나이 먹은 연산홍이 그 자태를 자랑한다. 바깥대문을 들어서면 5안채 앞퇴간 중문채가 사랑채와 직각축으로 놓이는 바 가운데에 있는 대문간과 직각 동선으로 연결된다. 여기 가운데 마당을 형성하기 위해서 바깥대문간과 중문간을 ㄱ자로 담을 두르고 사랑채 뒤에도 중문채와의 사이에 ㄱ자로 담을 쌓았다. 중문간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직각축으로 안채가 동북향(신좌인간(申坐寅間))하여 서있다. 안마당 남쪽에는 둑집인 광채가 사랑채 옆으로 약간 비껴 앉혀있고 북쪽에는 중문채 곁으로 2간 헛간채가 배치되었다. 안채 담장은 안채 뒤를 널찍이 돌아 북쪽 뒤로 후원문(後園門)을 만들고 꺾어져서 중문간 담장에 연결된다. 후원문을 지나면 넓지 않은 과원(果園)이 조성되었다. 종합하면 공간구성은 바깥마당에서 사랑마당으로, 바깥대문을 거쳐 보다 적은 가운데 마당으로, 중문을 지나 커다란 안 마당으로 각각 동선을 ㄱ자로 꺾으면서 집안에 진입케 되는데 우리나라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공간율동을 갖는다. 특히 사랑채 앞에 심어진 회나무와 연산홍은 가식(假飾)하지 않는 우리 선조들의 조원미(造園美)를 보이며 안채 옆으로 후원공간을 따로 마련하는게 재미있다.

안채는 一자형 6간전후퇴집으로서 남도지방의 일반적 공간구성을 보인다. 부엌은 왼쪽에 놓였는데 전후퇴를 함께터서 쓰며 벽장은 앞뒤퇴에만 마련되었다. 다음은 복판에 안방과 웃방이 놓였고 뒷퇴에는 각각의 골방을 만들었는데 안방과 웃방은 서로 개방되었으며 안방과 뒤의 골방은 틀 수 있는 미닫이로 구분되고 웃방 뒤의 골방은 벽으로 막아서 아래 골방으로만 샛문으로 연결된다. 다음은 2간 대청이 만들어졌는데 아래뒷퇴는 툇마루가 놓여서 뒤로 개방되고 위 뒷퇴에는 사당방을 만들어서 아랫퇴로만 연결시키고 대청과는 벽으로 막았다. 건넌방은 맨 머리에 놓이며 뒷퇴까지 사용한다. 안방으로부터 건넌방까지의 앞퇴에는 툇마루가 놓였는데 건넌방앞의 들마루가 특히 높게 시설되었다. 대청 앞문은 분합문(分閤門)으로 만들어졌으며 안방 앞창은 용자(用字)살문, 웃방 앞창은 아자(亞字) 살문으로 되었다. 덧문은 모두 세살문이다. 웃방과 대청 사이도 분합문이 시설되었다.

함실구조는 2고주5량인데 대청 가운데만 긴보 5량이다. 댓돌은 자연석 허튼층쌓기이고 초석은 네모꼴인데 낮다. 기둥은 네모꼴이며 납도리인데 종도리와 처마도리만 장혀를 받쳤으며 특히  전면만 단이(보아지)를 받쳤다. 보는 둥근꼴 휘어진 그대로이며 대공은 높은 사다리꼴 토막으로 된 판대공이다. 특이한 점은 대청 가운데를 긴보 5량으로 처리하면서 내진주에 앞뒤로 각각 헛기둥을 세운 점이다.

사랑채는 一자형 5간전퇴집으로서 안채의 공간구성과 비슷하다. 오른(동)쪽에 부엌을 배치하고 상부에는 다락을 시설했다. 앞퇴에는 조그만 골방을 만들어서 앞툇마루에 연결시켰다. 다음은 복판에 위아래 2간의 사랑방이며, 다음에 대청과 작은사랑방이 차례로 놓였다.
 
최태하가옥을 답사하면서 의문점이 안채는 초가이고 사랑채는 기와인 점이었다. 문화재관리인의 설명은 안채의 구조가 빈약하여 무거운 기와의 하중을 견딜 수 없어서 초가로 바꾸었다는 설명이었는데 문화재관리상 이런 설명은 맞지 않는 것이어서 보은 군청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하였다. 담당자의 답변은 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안채가 기와지붕이었는데 해체보수할 때 우진각지붕의 구조가 발견되었고, 60년대 새마을 운동이 활발할 때에 초가집을 없애야하는 이유때문에 팔작지붕으로 지붕개량을 하면서 세멘트 기와를 얹었다는 후손들의 증언이 있어서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서 원래의 구조대로 초가로 복원을 하였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후대에 지었고 본래 기와지붕이었다고 하였다. 2010년 7월 22일 답사
안채 마당의 왼쪽에 조그마한 구조물이 있고 느낌에 예전에 우물이 있어서 우물을 덮은 것이 아니었나싶어 그 동네에 살고 있는 문화재 관리인에게 우물자리였느냐고 물었더니 이 동네가 풍수지리학적으로 '배터'이기 때문에 집에 우물이 있어서는 안되고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와 있지만 예전부터 집안에 우물이 있는 집은 한곳도 없었다고 한다. 후손들이 항시 거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1주일에 한번은 하루밤을 묵어면서 청소도하고 관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 묵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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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건넌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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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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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슬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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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장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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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대청의 사분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