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궁전

터키, 이스탄불 - 사원들

문성식 2014. 2. 2. 13:26
터키, 이스탄불 - 사원들

히포드럼광장(Hippodrome)

이곳은 "U"자 형태의 큰 경기장이었다. 여가 및 오락, 귀족들의 사회 모임, 결혼식, 시장 등이 열리던 곳이다. 비잔틴 시대에 세가지 기능이 있었다. 첫째는 각종 스포츠 경기 및 예술 활동의 무대였다. 전차 경기, 전투사들의 격투등. 둘째는 정치 무대였다. 오토만 시대에 폭동이 시작되고 셋째는 비잔틴 황제들의 야외 박물관으로 장식 기능이다.

현재는 옛 흔적이 없고, 이집션 오벨리스크, 뱀기둥, 콘스탄틴 기둥, 분수대등 유적들이 있다. 고대 도시의 심장부로 술탄 아흐멧 광장이라고도 불린다.


이집션 오벨리스크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로, BC 15세기 만들어 졌다. BC 390년에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의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 아래 대리석 받침대 4면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후 무희들이 춤추는 모습, 전차 경기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의 일들이 부조되어 있다.

 

 

콘스탄틴 기둥

콘스탄틴 7세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실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10세기에 세워졌다. 높이는 32m이며, 외부는 청동이 입혀져 있었는데 13세기 초 라틴군이 점령한 후, 청동을 떼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했다. 1894년 지진으로 부서졌으나 최근에 복구되었다.

 

 

그리스 아폴로신전에서 가져온 세펜타인 기둥 (청동뱀탑)

이 탑은 그리스가 무슨 전쟁인가에서 승리하고 노획한 무기를 녹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탑은 뱀 세마리가 서로 꼬고 서있는 모습으로 맨 위에는 뱀대가리 3개가 있었으나 취객에 의해 머리가 부러지고 그 뱀대가리 한개는 터키 박물관에 한 개는 영국 대영박물관에 나머지 한 개는 행방불명이란다.

 

 

Blue mosque,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t Camii)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Sultan Ahmet 1세의 명령에 따라 1609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7년이란 공사기간 끝에 1616년에 완성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직격 27.5m의 거대한 중앙 돔을 작은 4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설교단(민바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설교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술탄의 전용 기도실이 있다.

모스크 내부는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의 이즈닉 타일과 푸른빛의 260개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파란색의 타일이 많은 사원이라 하여 ‘Blue mosque’라 부른다.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인 아흐메트 1세(Ahmet I, 1603-1617)는 이 자리에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훌륭한 회교 사원을 짓기로 마음 먹는다.

술탄 아흐메트 1세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에 건축가 메흐메드 아아(Mehmed Aga)에게 황금으로 된 미나레(minaret), 즉 첨탑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재정 형편상 황금으로 첨탑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묘책을 세우게 된다. 황금 첨탑이 아닌 여섯 개의 첨탑을 세우라고 들었다는 것이었다.

 

 

 

 

 

 

 

 

 

 

 

터키어로 황금은 'altin' 이고 '6'은 'alti'이다. 다행히도 순례를 다녀온 아흐메드 1세는 여섯 개의 첨탑이 마음에 들어 건축가를 벌주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문제가 생겼다. 당시 메카의 대사원의 첨탑이 6개였기 때문에 이를 능가하는 사원을 지으면 마호메트를 모독하는 신성 모독의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 술탄은 곧 메카에 사람을 보내어 첨탑 하나를 더 짓게 해서 이를 해결했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기념비 중 하나이다. 현재의 성 소피아 성당은 서기 6세기 중엽(532-537)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건축되었다. 그 후 916년간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1453년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메흐메드 2세는 성 소피아를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개조하였다.

하지만 성당의 이름은 바꾸지 않고 놓아 두었다. 아마 소피아가 '지혜'를 뜻하는 추상명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성(聖)'은 그리스어로 '하기아' 혹은 '아기아' 이지만, 터키식으로는 '아야'로 발음된다. 그래서 성당은 그리스 이름 그대로 '아야 소피아(Aya Sofya)로 불렸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이렇게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성당과 모스크(이슬람 사원)으로서의 특징을 모두 지니게 된다. 이 성당은 모스크로 사용되다가 1934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고, 그 영문 명칭은 "The Aya Sofya Museum'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성당 건물은 같은 장소에 세 번째 지어진 것이다. 즉 성당은 두 번에 걸쳐 파괴된 후 다시 재건축되었다. 첫째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메가 에클레시아(큰 교회)'라는 이름으로 360년에 개장되었다. 그 다음 해 이 성당의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 즉 '성스러운 지혜'의 성당으로 개명되었다. 이 건물은 404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이오니스 크리소스톰가 추방되자,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둘째 성당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령으로 다섯 개의 둥근 천장과 나무 지붕으로 갖춘 건물로 415년에 재건되었다.

 

 

 

 

 

 

 

 

 

이 성당은 117년 후 '니카의 대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당시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니카' '니카'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한다. 니카는 '승리'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이 폭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니카' '니카'라고 외치며 주요 관공서를 습격하며 여기저기 방화를 저질렀다. 이 방화로 성 소피아 성당, 성 이레네 성당도 불타고 말았다. 당시 유스티니아우스 1세는 532년 니카의 대란을 진압한 다음 곧바로 두 성당의 재건을 명령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최고의 성당을 짓고 싶었을 것이다. 현재의 성당은 532년 2월 23일 건축이 시작되어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성당의 재건에는 종교적인 열정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성당의 완공은 단지 5년 10개월 4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유스티니아우스 1세는 최고의 성당을 짓기를 원했고, 또 그것을 실현시킬 힘을 갖고 있었다.

성당 건축은 안테미우스(Anthemios)와 이시도루스(Isidorus)라는 두 건축가가 공사를 지휘하고, 천명의 장인과 만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각 지역에서 귀한 건축 자재들을 운반해왔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성당이 완공되고, 성당을 개장하는 날, 유스티니아우스 1세는 제단으로 올라가 "솔로몬이여, 우리는 당신을 이겼노라!"고 외쳤다.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수도 1000년 동안 다양한 건축물의 축소판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성 소피아 성당은 최고의 건축물에 속한다. 이 건물은 1000년 동안 비잔틴 성당의 모델이었다. 성당은 두 번이나 소실된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본체에 목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성당은 돔을 갖춘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형식의 건축물로 재건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외랑과 내랑으로 구성되어 있고, 위에 거대한 돔이 있는 중앙의 본당, 두 개의 복도, 그리고 갤러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성당의 평면은 4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30m×30m의 공간을 감싸고 있는 70m×76m 크기의 사각형으로 구성되었다. 기둥는 둥근 돔을 지지하는 사각형의 옆을 가로지르며 4개의 육중한 아치들을 지지한다. 중앙 돔의 직경은 33m이며 그 높이는 55m에 달한다. 반구형 쌍둥이 돔은 아치 아래로 확장되어 네이브의 길이를 2배로 만든다.

 

 

 

 

 

이 성당은 여러 차례의 개조와 복구, 오토만 시대의 훼손과 그 후의 복원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당은 553년과 557년의 지진으로 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558년 돔의 상당 부분이 붕괴되었다. 다시 만들어진 돔은 처음 것보다 조금 더 작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상타파시대(726~842년)에는 성당 내부의 인물화로 된 우상과 모든 판넬들이 제거되었다.

대신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단순한 십자가 만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지진으로 건물의 일부분 및 중앙 돔이 파괴되었고, 다시 복구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오스만 터키 시대에 모스크로 전환되어 사용되면서, 여러 부속 건물과 첨탑 등이 첨가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드 2세는 남동쪽에 벽돌로 된 첨탑을 세웠고, 셀림 2세 때(1566~1574)는 북동쪽에 첨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무라트 3세 때(1574~1595) 나머지 두개의 첨탑이 세워졌다. 술탄들의 왕능은 셀림 2세 때 정원에 세워졌으며, 오토만 터키 시대 동안 설교자석, 사회자석 등이 추가되었다. 1736년에는 건물 내부에 도서관이 만들어졌고, 1742년에는 초등학교 건물이 외부에 세워졌다. 그 후 몇 차례 중요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하궁전 (Yerebatan Samici)

이스탄불 구시가지에서는 지하 저수지가 몇 곳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 저수지는 4세기부터 6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걸쳐 만들어 졌다고 한다. 예레 Yere는 '땅에', 바탄 batan은 '가라앉다'는 뜻의 터키어인데, 이곳은 마치 지하의 커다란 저수지 같다. 비잔틴부터 오스만 왕조 시대까지 이곳은 주변지역의 중요한 물 창고 였다. 물은 아타튀르크 거리에 걸린 발렌스 수도교에서 이곳으로 끌어 왔으며 후에 토프카프 궁전의 술탄들의 목을 적셔 주었다고 한다.

전체 크기는 세로 140m, 가로 70m, 높이 8m 정도이며 내부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 원래 이 기둥도 28개의 원주가 12줄로 합계 336개 였지만 19세기말에 90개가 없어졌다. 지금도 지면에는 물이고여 있으며 내부는 찬 기운이 돈다. 프랑스인 고고학자가 발견할 때까지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며 사람들은 지하 궁전 위에 집을 짓고 마루 아래에 구멍을 뚫어 물을 긷거나 낙시를 했다.

어두운 열주사이를 불빛을 따라가면 위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궁전의 가장 안쪽에 이곳의 백미인 메두사의 얼굴 두개가 한개는 가로 뉘어, 한개는 꺼꾸로 있다. 거대한 메두사의 머리도 1984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 때 바닥에 남아 있던 2m나 되는 진흙더미를 없애면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어둠속에서 괴기스러운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메두사는 전설처럼 자신을 본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Zingarella (짚시소녀, 터키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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