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22세 되던 189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로는 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즉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반 사이에 주로 궁궐 안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895년 관직을 물러나 10년 동안 자신을 가꾸었다. 중형 회영(會榮)을 비롯하여 이상설(李相卨)과 같은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근대학문의 탐구에 몰두한 것이다.
선생이 다시 관직에 나선 시기는 1905년, 즉 관직을 물러난 지 10년 지난 시기였다. 이번에는 외부(外部)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선생이 자리를 맡자마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이 강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것을 막아내야 한다고 작정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박제순은 을사조약을 받아들였다. 이에 비감해진 선생은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집안은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당시 선생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이 약혼한 상황이었는데, 을사조약 체결에 박제순이 동의하자 선생은 즉각 혼약을 파기하고 절교해 버린 것이다. 선생이 외부 교섭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강제체결을 막지 못함에 따른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한일합병 후 선생 형제 가족 50여명 가진 재산 처분…독립군 기지 건설 위해 만주로 모두 망명
선생은 그 다음 해에 다시 관직에 발탁되었다. 만 37세이던 1906년에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된 것이다. 당시 평안남도가 얼마나 중시되던 지역이었는지를 고려한다면 선생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망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지에 부임한 선생은 근대학교 설립 및 구국계몽운동 확산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907년에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이 되어 상경하고, 1908년에는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이 모두 만 40세가 되기 이전에 선생이 맡았던 관직들이었으니, 선생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이 관직생활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07년 형인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을 때, 선생은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참가하였다. 이 사실은 나라를 잃자마자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동참한 것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면서,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다. 1900년대에 의병항쟁을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방략이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계몽운동가들 가운데, 신민회 그룹은 무장항쟁의 방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의병처럼 준비되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밀고 나가기 위한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아 나갔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판단한 신민회는 일제 강점에 들기 전부터 만주지역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잃자마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에서 망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 길이다. 눈 질끈 감고 일제에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면 조상 대대로 누려온 권리와 명예를 고스란히 누릴 수도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다는 말이다. 가는 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대가족이 모두 망명길에 오른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명문거족이나 권문세가 출신으로 다수가 망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회영과 선생 형제 일가 50여명이 만주로 망명한 사실에 대해 박은식은 ‘명문거족 가운데 유일한 경우’라고 평가하였다.
전재산 처분한 돈, 민족교육기관과 독립군 양성기관에 쏟아 부어. 훗날 청산리대첩의 밑거름…
선생은 형제들과 더불어 가재(家財)를 처분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1910년 말 서간도(西間島)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 三源堡 鄒家街)였다. 일행이 도착한 직후인 1911년 4월에 그곳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전자는 동포사회의 자치기관이요, 후자는 인력양성기관이었다.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면 군대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하자면 인력과 재력이 필요했다. 우선 동포사회를 구성하여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근거지를 마련하여 정착지를 갖춰야 했다. 경학사의 결성은 곧 동포사회의 형성과 운영을 이끌어 가는 데, 또 신흥강습소는 인력, 특히 군사력을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둔 기관이었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발전되어 갔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가면서 독립군기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이 당시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지만, 이시영 형제들도 모두 여기에 참가하면서 국내에서 마련해 간 재원을 쏟아 부었다. 이들의 활동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러일전쟁이나 중일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예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선생도 참가한 독립군기지 건설이 허망한 사업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바로 1920년의 청산리대첩이 그를 확인시켜준다. 그 날의 승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누리던 온갖 특권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유와 그곳에서의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청산리 승전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세개(袁世凱)에 주목하기도 했다. 선생은 1913년 9월에 북경으로 갔다. 국내에서 이미 잘 알고 있던 원세개를 이용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북경행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원세개가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던 그 무렵에 선생이 자리잡은 남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919년 2월 1일자로 발표된 이 선언에는 남만주 일대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활동하던 주역들이 서명하였는데, 선생도 이상룡․이동녕․김동삼 등과 여기에 참가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한성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수립 선포된 정부마다 선생을 법무총장이나 재무총장 등 중요한 각료의 한 사람으로 기록했던 이유가 모두 이러한 활동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