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혁명당 세우고, 철혈단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
한편 1926년부터 우리 독립운동계에는 중국 국민당과 같은 민족대당(民族大黨)을 결성하여 이당치국(以黨治國)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하여 이당치국의형태를 도입한 개정 헌법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에 독립운동자들은 각각의 운동방략과 이념, 친소(親疏) 관계 등에 따라 독립운동을 제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독립 후의 신국가건설이나 민족사회의 재구성 방안을 정강(政綱)으로 제시하면서 민족정권에의 적극적 참여의지를 표출한 독립운동정당을 창당하여 갔다.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선생 또한 이 같은 조류를 선도하면서 1929년 안재환․윤기섭․성주식․김홍일 등과 남경에서 한국혁명단(韓國革命黨)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 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는 한편 <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인 동포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배양하여 갔다.
이 시기 일제는 대륙지배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2년 1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단일 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으자.” 민족혁명당,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차례차례 참여
이에 따라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항전에 결집할 필요성이 더욱 증폭되어 갔다. 때문에 각각의 독립운동단체와 정당들은 대일항전에 총력을 다하고자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에 온갖 노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선생은 이때 한국혁명당의 대표로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생은 이 동맹에서 최동오(崔東旿)․김규식(金奎植)․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동맹은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속력과 통제력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대일항전에 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결성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1934년 초 선생은 단일대당 형성의 일환으로 우선 자신이 속한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관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매개로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단일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 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윤기섭)․의열단(김원봉)․조선혁명당(최동오)․한국독립당(조소앙)․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졌는데, 이의 성공이 있기까지 선생의 역할이 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한국독립당 재건파가 탈당하고, 나아가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비(非) 의열단 계열의 일부 인사가 이탈함으로써 그 세력이 위축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7월 7일 일제는 노구교(蘆溝橋)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 등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陣線) 결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2월 민족혁명당(김규식․김원봉)․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등의 조선민족전선연맹(民族戰線) 결성이었다. 민족혁명당의 선전부와 국민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은 이때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그 뒤 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38년 9월 민족전선 내의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로 한구(漢口)에서 새롭게 조직된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에 가담하였는데, 이는 애시당초 무장투쟁을 주장해 왔던 선생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신이었을 것이다.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외교와 선전 분야에서 일하다 중경에서 광복 맞아
한국 독립운동계의 대립은 대일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외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양대 계열의 핵심적 인물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에서 통합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 27일부터 사천성 기강에서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광복진선 측 3개 당 대표로는 한국국민당의 조완구․엄항섭, 한국독립당의 홍진․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이청천․최동오 등이 참석하였다. 민족전선측 4개 당 대표로는 민족혁명당의 성주식․윤세주,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그리고 조선청년전위동맹에서는 신익희 선생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7당 회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崔昌益) 등 18명이 통합회의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안으로 가버렸다. 따라서 7당 통합이 무산되어 독립운동상에서 항상 통합과 연대를 앞장서 실천해 온 선생은 매우 통탄해 하였다.
이후 선생은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에는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6월 선생은 임정에서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엄항섭․유림(柳林)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1944년 5월 임정의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