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도 “나는 세계평화(世界平和)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 사령(司令: 사령관)이 되었다.”고 호언장담한 오동진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4,149명을 지휘하면서, 일제관공서 습격 143회·일제관리 살상 149명·밀정 등 살상 765명이라는 당시 평북경찰부의 통계가 말해주듯 평생을 항일무장투쟁으로 일관했다. | |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 후 중국으로 망명, 비밀결사 광제청년단을 조직
오동진(吳東振, 1889~1944) 선생의 휘(諱)는 동진(東振)이며 아호(雅號)는 송암(松菴), 별호는 순천(順天)이라 하였다. 1889년 평북(平北)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平面) 청수동(靑水洞) 659번지에서 출생한 후 생후 반년 만에 생모 한씨(韓氏)와 사별(死別)하고, 12세 때 후모 백씨(後母 白氏)를 만났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온후하고 정의심이 강하여 언제나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기쁨과 슬픔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19세 되던 해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귀향하여 향리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청소년 학도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선생은 1919년 3월 16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사건으로 일경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3월 18일 중국 관전현(寬甸縣) 안자구(安子溝)로 망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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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곳에서 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을 규합하여 비밀결사인 광제(廣濟)청년단을 조직했으며,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5월 중국 안동(현 단동시)에 있는 이륭(怡隆)양행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聯通)기관을 설치하고 안동교통사무국을 두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관할했다. | |
광복군총영을 조직하여 일제기관 및 요인 제거
오동진 선생이 총영장으로 활동한 대한광복군총영의 약장(1920년 7월 1일). 대한광복군총영의 명칭·목적·위치·단원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독립기념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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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2월, 선생은 대한의용군사의회·한족회·기원독립단·민국독립단·대한청년단연합회 등을 통합하고, 서북간도지방 내무부 직속의 광복군참리부와 군무부 직속의 군사기관으로 광복군사령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군영을 두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6월 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탁(李鐸)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질적 군대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조직되어 사령관에 조맹선(趙孟善)·참모부장에 이탁·경리부장에 조병준(趙秉準)이 임명되었고, 선생은 총영장(總營長)이 되었다.
광복군총영은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장총 2백 40여 정과 많은 탄약을 이륭양행을 통해 입수하였다. 이렇게 항쟁준비를 위한 무장을 강화하고 있을 때, 미국의회 동양 시찰단인 모리스 의원 등 상원의원 일행과 가족 70여 명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입경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광복군총영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국내에 있는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하며 침략원흉과 일제관리 등을 처단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20년 7월 결사대원을 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어 미 의원단 일행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일제관청을 파괴하고 일제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 |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으로 항일전 전개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梁起鐸)이 제안한 동삼성(東三省)내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적극 찬성하고, 김동삼(金東三)·현정경(玄正卿)·이상룡(李相龍)·이탁 등과 광복군총영·서로군정서·한교민단·광복단·독립단·대한청년연합회를 통합, 통군부를 조직했으며 2개월 후에는 다시 대한통의부로 확대 발족시켰다. 이후 군사위원장이 된 선생은 이듬해 6월 신팔균(申八均) 사령장이 전사함에 따라 사령장을 겸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총지휘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다. | |
1925년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 겸임
1925년 1월 25일경 선생은 통의부의 고문인 양기탁 등과 통의부를 중심으로 길림주민회·의성단·대한독립단·광정단동친목회·변론자치회·고본계·대한독립군단·학우회 등 지방자치단체를 총망라하여 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를 조직했다. 정의부는 통의부와 마찬가지로 입법·행정·사법기관을 두었으며, 중앙집행위원장 밑에 내무·군사·학무·생계·재무·외무 등 6부를 두었다. 군사부에는 정의부 의용군을 두고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사령장에 선생이 겸무했으며, 8개 중대에 무장한 7백여 명의 병력이 각종 군사활동을 전개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1926년 3월 3일에는 길림성 내 양기탁의 집에서 각계 인사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여 좌우익 세력의 합작으로 새롭게 통일된 독립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고력혁명당의 당원수는 1천 5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선생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총사령을 겸임했다. | |
옛 동지의 밀고로 장춘에서 일경에게 붙잡히다
[왼쪽] 오동진 선생의 부인 회견기(<동아일보>, 1928년 2월 11일자). 선생의 부인 "이양숙(李陽淑) 여사는 지금까지 자기 남편이 남의 손에 잡힌 줄도 모르고 있던 중, 최근에 신문지상으로 그 소식을 듣고 (중략) 신의주로 와서 철창에 있는 오동진과 눈물 겨운 면회를 하"였다고 한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오른쪽] '불굴의 투사' 오동진 선생의 추모회 보도기사(<자유신문>, 1945년 12월 4일자).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이 무렵 선생의 옛 동지 김종원(金宗源)이 선생에게 “삼성(三成)금광주인 최창학(崔昌學)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했다. 선생은 김종원을 믿고 1926년 12월 16일, 장춘 시내의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러나 이미 일제의 앞잡이로 변해 있었던 김종원의 밀고로 신의주 악질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고, 1929년 11월 11일부터 33일 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5일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선생은 광기가 발작했다는 이유로 퇴장당한 채 검사로부터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며, 3월 9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선고되었다. | |
옥중에서도 2차례에 걸쳐 단식을 실시, 무장항쟁에 전 생애를 바치다
공소를 제기한 선생은 그 해 6월 평양에서 1심과 똑같은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더 이상 일인(日人)의 재판이 필요 없음을 깨닫고 상고를 포기했다. 7월 장기수를 수용하던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선생은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의 제2차 단식을 벌였다.
7년간의 형무소생활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선생이 2차 단식에 들어가자 모두들 선생의 정신력에 경이로움을 표시했으며,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선생과 면담을 할 때에는 경례하고 예를 갖추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가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이는 바람에 선생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어, 그 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발행일 201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