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이다.”
안경신 선생,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다
안경신 선생은 평안남도 출신이다.1)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을 수료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의 국내기관이었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 활동도 일경의 감시와 체포로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대한광복군 총영의 활동에 가담하였다.
- 1920년 11월 일제경찰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애국부인회 활동 당시 선생의 본적은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로 되어 있고, 나이는 25세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1921년 체포되었을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거주지가 평남 대동군 금제면으로 되어 있으며, 나이도 34세로 되어 있다. 1920년 일제경찰이 대한애국부인회 관계자를 검거할 당시 선생은 도피한 상태였기 때문에 보안상의 이유로 체포된 대한애국부인회 간부들이 안경신 선생에 대한 정보를 허위로 진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체포된 간부들의 주소는 번지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나 체포되지 않은 간부의 주소는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의 나이와 주소는 1921년 체포 당시 언론에 보도된 자료가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은 더 이상 평화적인 외교적인 청원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무력적인 응징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여성이지만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과감하게 폭탄거사에 뛰어들었다. 안경신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를 폭파시킴으로써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평양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평양에서 시작되자 안경신 선생은 이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3․1만세운동은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한 오후 1시에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셈이었다.
평양은 19세기말 이후 서구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기독교와 함께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근대 민족운동의 핵심 주체 지역이 된 곳이었다. 이곳은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새로운 근대문명의 전초기지였다.
평양 3․1만세운동은 기독교계에서 신한청년당의 선우혁과 함께 3․1만세운동을 기획했던 이승훈이 총지휘하였다. 이승훈은 105인사건의 동지였던 윤원삼과 안명근 의거 당시 김구와 독립운동 동지였던 도인권에게 평양 3․1만세운동을 책임지게 했다. 2월 12일부터 27일까지 여러 차례 회합을 거쳐 3․1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태극기는 숭현여학교와 숭덕학교 남녀학생들을 동원해서 제작되었다.
평양 3․1만세운동의 모든 경비는 안정석이 책임졌다. 안정석은 만세운동 직후 조직된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여성항일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다. 안경신은 안정석과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을 함께 했다. 안정석과 안경신은 기독교 감리교 신자였기 때문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평양에서 만세운동은 3개의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2개의 장소 중 하나는 장로교인들에 의해, 또 하나는 감리교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천도교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 세 장소에서 독립선언식을 한 후 시위행진을 하면서 합류하기로 계획하였다.
장로교에서는 이 날 오후 1시 장로교 장대현교회 앞마당이자 숭덕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하였다. 명목은 “광무황제 봉도식”이었다. 일천 몇 백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자 조선독립식을 선포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선포식을 마친 후에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감리교에서는 안정석 집에서 준비를 하였다. 그녀의 집은 평양시 이향리에 있는 3겹 대문의 큰 고가였다. 안정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었지만 시동생들이 군수 등 일본 관직을 역임하였으므로 일제로부터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감리교에서는 광성학교 근처에 있던 감리교 남산현교회 뜰 안에서 진행되었다. 천도교는 구 대성학교 뒷자리인 천도교구당에서 천도교 중심의 집회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3개의 장소에서 독립식을 마친 많은 군중들은 시위행진을 시작해서 시내 중심가에서 합류하여 대대적인 행진에 들어갔다.
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9일까지 계속되었다. 3월 2일 오후 1시부터 평양 경찰은 대거 출동해서 진압하기 시작했다. 3월 8일까지 검거된 인원은 4백 명에 달했다. 평양 시내 상가는 철시를 통해 독립을 지지했고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동맹휴학을 했다. 평양의 만세운동은 3월 26일, 4월 1일 다시 재개되었다.
안경신 선생은 이와 같이 전개된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선생은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을 수료한 후 귀향했다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서문동에서 적극 참가했다. 평양 서문동은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남산현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안경신 선생은 만세운동 가담으로 체포되었다가 29일간 유치되었다.
3․1만세운동 직후 항일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3․1만세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임시정부와 연결된 많은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조직을 만들어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지지하였다. 안경신 선생은 항일여성운동단체에 참여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3․1만세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여러 항일여성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대표적인 국내 항일여성운동단체들로는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에 본부를 둔 대한애국부인회, 평남 순천의 대한국민회 부인향촌단, 강서의 국민향촌회, 평양의 결백단, 평남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단, 평남 개천의 여자복음회, 서울의 독립여자부 등을 들 수 있다. 평안도민들은 19세기말 이후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민족운동의 핵심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여성단체들도 거의 평안도 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이중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대한애국부인회는 전국적인 지부까지 둔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서울에서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1919년 3월 중순경에 조직된 혈성단애국부인회와 같은 해 4월경에 조직된 대조선 독립애국부인회가 통합 발전하여 결성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한 것이다. 이 두 단체가 통합을 하게 된 것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앞두고 국내 부인대표를 파견해달라는 요청 때문이었다. 대한청년외교단 이병철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의 김원경을 사전에 부인대표로 파견한 후 혈성단애국부인회의 오현주를 만나 두 단체의 통합을 권유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단체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였다.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회장 오현주의 활동 부진으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활동이 점차 약화되어가던 중에 조직의 강화를 위해 재편성되었다. 새로 선정된 임원들은 대부분 장로교 중심의 기독교여성들이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서도 같은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19년 11월 감리교의 애국부인회와 장로교의 애국부인회가 서로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감리교의 애국부인회는 오신도, 손진실, 송죽회 지도자 안정석과 박현숙, 전도부인 김세지, 이성실, 최순덕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리고 장로교의 애국부인회는 북장로회의 한영신, 목포 정명여학교 교사 김보원, 평양 숭현여학교 교사 김용복 등이 뜻을 모아 결성하였다. 이 두 단체 주도세력들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김정목과 김순일의 권고로 여러 차례 회합을 거쳐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내한선교사가 경영하던 기홀병원과 교회에서 회합하였다. 11월 평양 신양리의 김경희 집에서 모임을 갖고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애국부인회가 탄생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먼저 임원과 부서를 결정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각지에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지회를 조직하였다.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총재 오신도(61, 상해 임시의정원의장 손정도 목사의 생모)
회장 안정석(38, 대동군수의 의매)
부회장 한영신(34, 장로교 반장)
재무부장 조익선(30, 장로교 신도)
부재무부장 김세지(55, 감리교 전도부인), 김보원(33, 사립정명여학교 교사 장로교)
교통부장 최순덕(23, 감리교, 대동군수 질녀, 학생), 이성실(26, 교사, 감리교)
적십자부장 홍활란(28, 감리교)
적십자부원 정월라(26, 미국 하와이 거주, 감리교)
서기 최명실(28, 장로교), 최매지(24, 교사, 진남포 감리교 지회장), 이겸랑(26, 평양장로교 지회 서기)
부서기 주광명(26, 정진여학교 교사, 감리교)
평의원 김신희(26, 감리교, 사망), 강계심(40, 상업, 장로교), 박몽애(27, 감리교)
교통부원 송성겸(44 전도부인, 증산 감리교 지회장), 안경신(25)2)
- 일제 서류에는 25세의 감리교인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신분장지문원지에는 1888. 7. 22일 생으로 되어 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임원을 선출한 후 즉시 지부 설치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가입한 지부는 모두 8개 지부로 평양감리회지회, 평양장로회지회, 진남포감리회지회, 진남포장로회지회, 강서군감리회지회, 함종감리회지회, 증산감리회지회, 순천장로회지회 등이었다. 이 지부들은 새로 설립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지방부인회가 지회로 흡수된 것이었다. 활동의 결과 회원이 100여명에 달했다.
안경신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본부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예를 들어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에 조직된 국민향촌회를 재조직한 강서지회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국민향촌회는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의 한독신 이외에 4명의 여성들이 조직한 후 1919년 6월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원조기관으로 대한애국부인회 강서지회로 재조직하였다. 임원과 회원은 다음과 같았다.
회장 한독신, 부회장 겸 서기 박영복(29세), 회원 강마리아(27세), 박경순(49세), 홍순실(60세)
이들은 회원을 모집함과 동시에 군자금 모집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집한 군자금은 안경신 선생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강서지회는 1921년 6월에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었다. 안경신 선생이 활동한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원은 100여명이었다. 이 단체가 일경에 의해 발각되기 전까지 모집한 군자금은 2천4백여 원에 달하였다. 이 단체는 1920년 10월 발각된 이후 임원과 회원들이 체포되었으나 당시 안경신 선생은 체포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의 심장,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를 폭파시키다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안경신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피신했다. 안경신 선생은 1920년에 조직된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한광복군 총영은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이었다.
안경신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동지들과 만나 자신의 포부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곤 하였다고 한다.
나는 3․1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 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 - 같은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이와 같은 평소 생각이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방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이를 위한 준비를 갖추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남북만주 각지에 산재하던 독립운동무장단체들은 통일전선을 형성해서 조직적으로 단합된 독립군부대로서 일본과 전투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임시정부 평북독판부,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독립단 등의 대표들이 남만 관전현에서 첫 회합을 가지고 협의를 시작했다. 이어 남만주의 한족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과 회합하여 다음과 같이 통일 5원칙을 마련하였다.
1. 각 단체의 행동 통일기관을 설치하고 국내 왜적의 행정기관 파괴사업을 실행하되 각 단체의 개별적 명의로 하지 말고 반드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2. 연호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3.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상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 법명을 요청할 것
4. 통일기관은 국내와 접근한 압록강 연안 적당한 지점에 둘 것
5. 상기 통일기관 경비는 원칙적으로 각 단체가 평균 부담하되 국내로부터 특별수입금은 통일기관 군사비에 보충할 것
1920년 2월 대한독립단, 한족회, 대한청년단연합회 등의 대표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남북 만주 일대의 독립무장투쟁을 설명하고 위의 결의안 시행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1920년 7월 26일 군무부 직할의 대한광복군사령부 설치안을 의결하고 규정을 제정한 후 8월 1일부 시행으로 공포하였다. 사령부 본부는 관전현에 두고 8월 10일 사령장 조맹선을 비롯하여 8개국, 6개령의 각 장 사령부 간부진과 임원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맹선은 중․러 국경지대에서 독립군 양성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모장 이탁이 사령장 대리를 겸하도록 조치하였다. 광복군사령부의 편제가 완성되고 조직이 출범한 후 광복군 총영도 예하조직으로서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광복군 총영의 창립 시기와 조직의 성격에 대해 학계에서는 연구자에 따라 약간 관점이 다르다. 광복군 총영을 광복군사령부가 창립되기 전에 보는 관점이 있는 반면, 같은 조직으로 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광복군사령부의 기능이 상실되자 재조직된 것이 광복군 총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2009년에 출간된 김영범의 『의열투쟁 I : 1920년대』(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는 광복군사령부와 광복군 총영은 별도의 조직으로 창립되었으나 광복군사령부의 편제가 조직된 지 한 달 후에 조직이 정식을 출범하자 광복군 총영이 그 예하기관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광복군 총영의 총영장이던 오동진을 광복군사령부의 제2영장으로 임명한 것에서 찾고 있다. 광복군사령부와 광복군 총영이 별도의 조직으로 창립되었다고 해도 결론적으로는 광복군 총영은 광복군사령부가 창립된 후에는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광복군사령부는 독립전쟁을 대규모로 수행하는 상해 임시정부 직속 정규군의 총지휘부이며, 광복군 총영의 활동 목적은 “적의 통치기관 건축물 파괴, 적괴․창귀(倀鬼)3) 암살, 적의 행정기관의 문란” 등이었다. 광복군사령부는 만주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는 독립전쟁, 광복군 총영은 국내 작탄(炸彈)4)투쟁이 주요 목적이었다.
- 남을 못된 짓을 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손으로 던져서 터뜨리는 폭탄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1920년 7~8월 중에 미국의원시찰단이 필리핀, 중국, 일본 등을 시찰 방문하는데 한반도도 그 여정에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기회로 세계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려 하였다. 1920년 7월 5일 100여명의 미국의원시찰단이 가족을 동반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였다. 시찰단의 일정은 8월 15일 선편으로 상해에 도착한 후 남경, 북경, 천진을 거쳐 8월 23일 봉천을 출발하여 신의주를 거쳐 24일 서울로 왔다가 25일 부산을 출발해 동경으로 가는 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정부 중심의 외교노력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작탄거사를 통해 민심을 추동 시킴으로써 대대적인 시위를 촉발시켜 미국과 세계 여론에 한국독립을 호소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미국의원단의 상해 체류 시 그들과 만나서 선전물을 전달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동시에 군부를 통해 광복군 총영에 국내 폭탄 거사 및 실행 명령을 내렸다.
광복군 총영에서는 서울, 평양, 신의주 등 세 도시에서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먼저 대원 13명을 선발해서 3개 대로 나누어 밀파하였다. 거사용 폭탄은 구국모험단이 12개를 제조해서 임득산이 안동(오늘날 단동)의 이륭양행까지 운반한 후 의용단의 각 지단(支團)으로 보냈다. 3․1만세운동 직후 만주에 있던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망명청년들의 독립정신을 수렴하여 이들을 한곳으로 결집하기 위해 중국 공동조계 내에 폭탄제조학습소 겸 권술수련소를 비밀리에 설치하였다. 6월에 약 40명의 청년들이 “작탄으로 구국의 책임을 부담할 목적”으로 구국모험단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폭탄제조법 강습이 시작되었다. 폭탄제조법 교육은 영국인과 광동인을 교사로 초빙하여 이루어졌다.
결사대 제1대는 김영철, 김성택, 김최명, 제2대는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우덕선, 안경신, 제3대는 이학필, 임용일, 김응식 등이었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을 맡았다. 이중에서 안경신 선생이 속해 있던 제2대만 폭탄 거사에 성공하였다.
제1대는 모두 평안도 출신으로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망명한 후 대한독립단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1920년 7월 12일 관전현 안자구 본영에서 출발,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왔다. 서울로 가는 도중 친일파로 유명했던 평북 자성군수와 황해도 장연군수를 처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경의 경계가 심해져 다시 함경도로 우회하였다가 포목행상으로 위장한 후 무기를 감추고 7월 31일 서울 잠입에 성공하였다. 8월 23일 김최명은 종로경찰서, 김영철은 이완용의 집, 24일에는 김성택이 서울역에 각각 투탄할 계획이었다. 이는 오동진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사 직전인 8월 21일 중국요리집 아서원 6호실에서 성공을 다짐하는 자리를 갖던 중 일경에게 전원 체포되었다. 제1대 폭탄거사는 실패하였으며, 모두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이 선고되었고, 이들은 1929년에 만기 출옥하였다.
제2대는 의용단5) 평양지단과 긴밀한 협조 하에 평양 시내의 일제 통치기관을 투탄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음력 5월 하순 광복군 총영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을 건넌 후 한 노인의 집에서 음식을 대접받았다. 이들은 식사를 한 다음 2조로 나누어 제1조는 벽동 읍내로 들어가 친일파 황계익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경고문을 발포하고 읍민들에게 황의 죄상을 밝혔다. 제2조는 서하면으로 가서 파출소를 타격하고 집결지로 무사히 귀환한 후 다시 전 대원들은 의주, 삭주, 구성군을 지나 평남 안주군에서 검문하려는 일경을 사살하였다. 8월 1일 평양성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이곳에서 의용단 평양지단과 만나 계획을 진행시켰다. 먼저 의용단원 한준관이 운영하는 포목상점을 연락장소로 정하였다. 안경신 선생은 평양까지 폭탄을 비밀리에 반입하였다. 그리고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8월 1일 대동군의 박치은 집으로 일단 몸을 숨겼다.
- 1919년 음력 4월 초 홍석운 등이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임시정부 특파원인 김석황의 중재로 결사보국을 맹세하고, 지역의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조직
이러한 상황에서 의용단원이 먼저 거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평양 시내 각처에 「최급경고문」을 살포하였다. 최급경고문의 내용은 “관공리에게 퇴직을 명령함, 정탐자에게 회개를 명령함, 자산가에게 출연을 권고함, 일반국민에게 거의를 권고함” 등으로 되어 있었다. 8월 3일 밤 9시 30분경 의용단과 광복단 대원들은 거사를 단행하였다. 안경신도 이 때 합류하였다. 3개조로 나누어 거사를 전개하였다. 제1조의 목표물은 평남도청이었다. 의용단원 김예진과 17세의 숭실중학교 2학년생 김효록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터지지 않아 문일민과 우덕선이 다시 폭탄을 던지자 신축건물인 제3부(평남경찰부)의 담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부서져버렸으며, 일경 2명이 폭사하였다. 제2조는 장덕진, 박태열, 안경신이었다. 이들은 평양경찰서 앞에 도착해서 도화선에 불을 붙였는데 빗물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았다. 제3조에서는 의용단원 여행렬과 표영준이 평양부청에 투탄하였는데 이것도 불발하였다. 평양시내의 거사에 대해 언론통제로 2주 동안이나 보도되지 않았다. 당시 1920년 8월 19일자 『매일신보』에서는 폭탄 거사가 일어나자마자 취재를 했으나 언론통제로 보도하지 못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본월 3일 저녁에 평양에서는 폭탄사건이 일어나서 제3부를 파괴코저한 독립당이 있어서 매우 소동되며 평양천지는 가위 물 끓듯 하였지만 그 때 본사 평양지국에서는 시각을 지체지 않고 급히 전보로서 그 폭탄사건의 상황을 기별하여 왔었으나 당국의 금지로 인하여 보도치 못하였더니 지금에 비로소 당국이 해금하여 보도의 자유를 얻었음으로 그 일의 전후사실의 경과를 평양지국의 통신대로 보도하오.
평양경찰서 폭파에 실패한 박태열과 장덕진은 황해도 해주로 가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려 했으나 엄중한 경계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간도로 돌아갔다. 평남경찰부에 폭탄을 던진 문일민과 우덕선도 무사히 귀환하였다.
안경신 선생은 임신 상태였기 때문에 대원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어느 참외밭으로 피신하였다.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기자림에서 문현철을 만나 폭탄 한 개를 건네받고 거사의 기회를 다시 노렸다. 그러나 일경의 경비가 너무 심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피신했다. 안경신 선생은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호상리의 최용주 집으로 몸을 숨겼다.
결사대 제3대는 평북 신의주와 선천방면의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신의주를 맡은 이진무와 정인복은 8월 15일 밤 9시경 신의주역으로 들어가서 인접한 호텔을 겨냥하고 연결계단 쪽으로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계단의 일부만 파괴되고 호텔은 폭파되지 않았다. 선천방면은 이학필, 김응식, 임용일 등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신성중학교 학생 박치의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들은 8월 24일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시위를 촉발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일경의 철저한 감시로 인해 거사 일정이 지연되었다. 다시 9월 1일로 거사일로 정했다. 이날 새벽 3시 선천경찰서가 폭파되어 버렸다. 박치의가 던진 폭탄이 폭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광복군 총영의 인장이 날인된 경고문과 격문이 살포되었다. 박치의는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1년 9월 30일 평양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박치의가 체포되자 그의 일가친척을 비롯한 교회 목사 등 20여명의 주민도 거사 모의 및 협조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중에 14명이 평양복심법원에서 2년에서, 15년까지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임용일은 피신하여 상해로 귀환하였고, 이학필은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만주 본영으로 돌아갔다.
한편, 대동경찰서에서는 안경신 선생이 숨어 있는 곳을 알게 되어 해산 직후인 1921년 3월 20일 체포했다. 원산을 거쳐 25일에 평양으로 압송되어 26일 출산한 아기를 품에 안고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되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12일 정도 되었다.
안경신 선생은 평양지방법원 재판정에서 검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다. 이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안경신 선생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는 내용을 투서하였다. 당시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 광복군 사령장 이탁 자택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김구와 장덕진 등이 회합하여 “평남도청 폭탄 사건은 임시정부 특명으로 광복군 사령장의 지휘 하에 결사대장 장덕진이 동지 수명과 더불어 투탄한 것이며, 안경신은 전혀 무관하니 방면하라”는 내용의 투서를 김구, 이탁, 장덕진 등이 연서하여 총독부로 발송했다. 안경신 선생은 무죄를 주장하며 1심판결을 불복하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안경신 선생의 재판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재판 상황에 대해 『동아일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방청석에는 남녀노소가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서서 날카로운 시선은 모두 안경신에게 모였더라. 재판장은 사실 심문을 시작하여 피고는 무슨 불만한 일로 사형선교의 1심판결을 불복하고 공소하였는가 함에 피고는 하지 아니한 일을 하였다니까 불만족이 아니고 무슨 일인인가하고 대답하였다.
안경신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의 투서가 참작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평양감옥에 수감된 지 3달이 못되어 선생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27년 8년 만에 형기 몇 달을 남겨놓고 가출옥한 안경신 선생은 평양 신양리에 거주하고 있던 오빠 안세균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선생의 아들이 눈을 뜨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안경신 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이보다는 동지였던 장덕진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장덕진은 1924년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인과 시비가 붙어 중상을 당한 후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안경신 선생은 이러한 모든 슬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 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여성항일투사
안경신 선생은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무력적인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동지들의 증언에서도 그의 독립노선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
안경신은 비록 몸은 작고 보잘 것 없이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다. 외모보다는 내면의 세계가 알차고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한번은 나에게 ‘오늘의 사태를 해결하는 길은 독립의 청원이나 협상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협론으로 타결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취할 약간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이 가장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무력적 응징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던 매몰찬 증언을 나는 극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동지 최매지 또한 안경신 선생의 확고한 항일 의열항쟁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너무 강폭한 투탄 폭살 투쟁으로 오히려 해를 받는다면 항일투쟁에 가담 활동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하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녀는 잔잔한 미소만 띠고 긍정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안경신 선생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철저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폭탄 거사에 과감하게 참여했던 것이다. 안경신 선생의 과감한 폭탄거사투쟁은 한국여성의 강력한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안경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글
- 윤정란 서강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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