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단언하는 바 이천만은 그 나의 결심을 찬동하야 적극 전진하되 전자(前者) 부(仆)이어든 후자(後者) 계(繼)하고, 남(男)이 원수의 독수(毒手)에 사(死)하거든 여(女)가 진(進)하고, 노(老)가 원수의 참해(慘害)를 피(被)하거든 해자(孩子)일지라도 나아가기를 바라노라.
-<혁신공보 革新公報> 1919년 12월 25일자, 이동휘 선생의 인터뷰 중에서-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 활약하다
이동휘(李東輝, 1873.6.20~1935.1.31) 선생은 1873년 6월 20일 함남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아들을 아전(衙前)으로 출세시키고자 했던 부친 이승교(李承橋)는 선생을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통인 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본 선생은 대담하게도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었다. 사건 직후 선생은 서울로 도피하여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다. 선생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후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선생은 승진을 거듭하며 국방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군인들은 물론 도 인민들까지도 부형(父兄)과 같이 애모할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얼마 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선생은 광무황제, 2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 법관(法官),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사절,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 앞으로 보내는 8통의 유서를 작성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선생은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뒤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자, 일제는 선생을 배후조종자로 체포하고 4개월 후인 12월 초에야 석방하였다.
석방된 후 선생은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전도사로서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도활동도 하였다. 한일합병을 앞둔 1910년 8월 초에는 일제에 또 한 번 예비검속 되었다가 한일합병 선언 후에 석방되었다. 1911년 3월 다시 안명근, 양기탁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총감부에 체포된 선생은 인천 앞바다의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 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선생은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분열된 러시아 동포 사회의 단합에 힘쓰다
선생은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墾民會)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전도활동을 계속하면서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북간도 한인사회는 기독교계열 인사와 유학계열 인사들 사이에서 이른바 신구(新舊) 학파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기독교계열의 인사들이 주축이 된 간민교육회-간민회 계열의 신학파는, 일본의 간섭배제와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중국당국의 협력과 후원을 얻어야 하며 중국국적 취득과 호복(胡服)과 호발(胡髮)의 채택을 장려해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사우계(士友契)-공교회(孔敎會) 계열의 구학파는 이러한 동화정책을 민족문화말살 노선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선생은 신학파의 활동을 지도하는 한편, 구학파와의 단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1913년 10월 선생은 일제의 위협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북간도를 떠나 훈춘(琿春)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기호파(충청, 경기도 출신), 서도파(평안, 황해도 출신), 북파(함경도 출신) 간의 지방파쟁으로, 한인사회 대표기관인 권업회(勸業會)가 심각한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선생은 파벌해소와 민족단결을 강조하는 한편, 연해주 각지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권업회의 지방 조직정비와 한인사회의 단합을 위해 활동했다. 이는 1913년 10월 12일 자신을 위해 개최된 환영식에서 행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거저 단합이라 하면 명사가 박약하니 영원단합이라고 하옵세다. … 여러분은 생각하시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하나니 … 만경창파에 풍도(風濤)가 위험한데 … 같이 탄 배안에서 서로 돕고 서로 구제하지 아니하겠는가. 삼삼오오의 양의 무리가 갈 때에 호랑이의 날카로운 톱을 만나면 서로 합하야 나갈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과연 단합할지니어다. 나누면 제이차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늘날은 살부살형(殺父殺兄)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야 서로 나누지 말자.
선생은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은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正都領)에 취임하여 광복전쟁계획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당국은 일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을 비롯한 20명의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명령을 내렸다. 선생은 북간도로 이동하여 중국과의 연합을 통한 대일(對日) 전쟁계획을 추진하였지만, 1915년 중국이 일본과 21개조 문제를 타결하게 되면서 이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한인사회당 자료(1918). 1918년 5월 13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창당된 한인사회당의 활동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출처: 독립기념관>
1917년 3월 러시아 2월혁명 소식을 접한 선생은 신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찾아갔으나, 러시아헌병대에 독일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0월혁명 후인 1917년 11월 하순에야 석방되었다. 10월혁명 이후 선생은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18년 5월 13일,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을 창립주도한 인물들은 여러 세력으로 구성되었다. 한인사회당의 산파역은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하바로브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자 볼셰비키당 책임비서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였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2월혁명 이후 우랄지방에서 이인섭, 오성묵, 심백원 등과 최초의 한인 노동자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한 바 있고, 러시아 원동지방 한인사회 내의 친볼셰비키 세력 조직을 위해 러시아 원동지방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10월혁명 이후 선생이 감옥으로부터 석방될 수 있도록 도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인사회당의 초기 창립자들을 보면 김알렉산드라와 이인섭 등 우랄노동자동맹 출신들, 선생과 유동열, 김립 등 국내로부터 망명해 온 신민회 간부들, 그리고 하바로브스크 한인사회 지도자였던 이한영, 김종, 유스테판, 오와실리, 오하묵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하였다. 특히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는 러시아적군과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가하여 백위파군(白衛派軍)과 싸웠는데, 반수 이상의 희생자를 냈지만 국권상실 후 재러 한인이 전개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1918년 8월 초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간섭군의 개입으로 볼셰비키 정권이 붕괴되고 백위파 정권들이 들어서자, 한인사회당은 불법화되었으며 선생 역시 북만주의 오지로 도피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다
3·1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들과 국내외 임시정부의 조직자들은 미국 등 서구열강과 파리강화회의에 큰 희망을 걸고 독립이 가까운 시기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 결과로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조직, 발표되었다. 이들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손병희, 이승만과 함께 정부수반으로 선임되거나 국무총리총재 또는 군사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어느 직책도 수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주위의 측근들에게 “한인사회당의 당수면 되었지 무슨 정부의 직책이 중요한가”며 반문할 정도로 이들 임시정부의 각원취임수락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선생과 한인사회당은 3·1운동의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조직자들을 비판하였는데, 미국 등 서구열강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에는 열강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분할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 전망했던 까닭이었다. 이러한 전망이 가능했던 것은 선생을 비롯한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시베리아 내전시기에 미국 등 열강이 일본과 연합하여 반혁명적인 백위파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던 사실을 몸소 경험하면서 이들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 특별상설의회에서 대한국민의회측은 상해임시정부 특사 현순과 김성겸의 제안을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민의회는 상해 임정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가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봉대(奉戴)에 합의하게 되었고 국민의회는 해산을 선언하였다. 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선생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선생은 한성정부의 국무총리총재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출범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맡고자 상해로 갔다. 그러나 상해임정과 국민의회 사이에 합의사항의 해석을 둘러싸고 발생한 ‘승인개조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은 결국 “상해 측과 정전(政戰)을 벌임으로써 대국을 파괴할 수 없다”며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상해임정은 선생을 비롯한 주요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훨씬 확대되었으며,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사실상의 분립정부인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워싱턴에 설립하고 종래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수합하던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다. 그리하여 미주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서 상해임정은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이른바 ‘기호파’ 총장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편 선생의 한인사회당은 박진순과 한형권 등 특사들의 노력으로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차관제공을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선생의 한인사회당은 이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을 건네받았는데, 이 자금은 1920년 말 그리고 선생이 상해임정을 탈퇴한 후인 1921년 3월 말경 상해로 운반되었다.
상해임정이 지도자들의 대립과 갈등으로 제대로 활동을 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일제는 3·1운동 이후 급속히 성장했던 연해주지역과 서북간도지역의 한인민족운동세력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1920년 4월 연해주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4월참변, 그리고 1920년 10~11월 서북간도의 동포사회에 대해 대대적인 약탈, 방화, 파괴를 자행하고 수천 명의 동포를 살해한 간도사변 (또는 경신참변)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여름의 봉오동 전투와 가을의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는 한인 독립군이 일본침략군을 상대로 얻어낸 쾌거였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에 의하여 활동 근거를 파괴당한 독립군 부대들은 볼셰비키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혁명적 자유지’ 흑룡주(아무르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사변은 임시정부가 일본침략군의 만행으로부터 만주의 동포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 특히 러시아와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세력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선생을 비롯하여 만주, 러시아로부터 온 인사들이 중심이 된 급진론과 안창호로 대표되는 준비론 간의 노선논쟁이 촉발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의 상해도착 역시 상해임정 내외의 명쟁암투(明爭闇鬪)를 격화시켰다. 급진론의 득세와 모스크바 자금을 배경으로 하여 선생은 임시정부의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1921년 1월 초에 개최된 국무원회의에서 선생은 이승만에게 위임청원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대통령제의 폐지와 혁명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무위원제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와 다른 각원들의 반대로 자신의 임정개혁안이 좌절되자, 선생은 마침내 1921년 1월 24일 상해임정을 탈퇴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사진(1920.01.01). 중간에 이동휘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출처: 독립기념관>
이는 1919년 11월 3일 이후 선생과 김립 등 사회주의 세력이 참여함으로써 좌우연합의 민족통일전선적 성격을 띠었던 상해임시정부의 각원구성이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우파, 특히 기호출신 일색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선생에 이어 남형우, 김규식, 유동렬, 안창호 등 각료들이 연속 사퇴하게 되면서 ‘통합’ 상해임정은 이제 이승만 등 기호출신 각료들이 중심이 된 하나의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했다.
공산당 지도자로 민족운동을 이끌다
선생이 상해임정에 참여한 1919년 말에서 1921년 초까지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국내외 각지, 특히 러시아 시베리아 원동지역과 일부 만주지역에서 한인공산당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것이다. 이는 1919년 말 이후 시베리아 내전에서 백위파를 몰락시킨 볼셰비키 세력의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아울러 3·1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등 서구열강에 걸었던 지나친 기대가 실망과 배신감으로 바뀐 결과이기도 했다.
이들 공산단체를 지도할 중앙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선생의 한인사회당과 이르쿠츠크에서 새로이 부상한 신흥한인공산세력이 바로 그들로, 후일 각각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게 된다. 1921년 상반기 이들 두 세력은 전한공산당(全韓共産黨)의 지위와 만주, 연해주로부터 흑룡주의 자유시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부대들에 대한 지휘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던 러시아군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에 집결하고 있던 상해파계열의 사할린 의용대 등 독립군부대에 대한 무장해제를 감행하여 수백 명의 독립군을 살상함으로써, 독립운동사상 최악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참변을 일으켰다.
흑룡주(아무르주)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은 사건이 발생한 아무르주의 자유시(러시아어로 스바보드니)에서 따온 말로, 자유시가 위치한 아무르강(흑하)을 따서 아무르사변, 흑하사변 등으로도 불린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일본군대가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서북간도의 한인마을들을 공격하고 독립군부대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비롯되었다. 1920년 말에서 1921년 봄에 걸쳐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여 러시아 혁명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흑룡주로 이동하였다. 이에 더하여 연해주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던 한인부대들 역시 흑룡주의 자유시로 집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가을 이후 각축하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당권과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상해파는 원동공화국 대통령 크라스노체코프의 지원을 받아 이르쿠츠크파보다 한층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3월 자유시에서 한인빨치산대회를 개최하고 전체 한인부대들을 망라하여 대한의용군사위원회(이후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르쿠츠크파의 후원자인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 슈미야츠키가 크라스노체코프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사태가 역전되어, 이르쿠츠크파는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함으로써 전체 한인무장세력에 대한 지휘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합동민족군대와 대한국민의회 계열의 자유대대가 연합한 러시아인민혁명군이 1921년 6월 28일 상해파 계열의 사할린의용대, 이만부대, 청룡부대 등 연해주와 흑룡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부대들을 무력진압하게 된 것이다.
이동휘 선생 별세 보도기사,<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선생이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3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운동성향과 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다. 상해파는 한인민족운동의 전통과 경험에 뿌리를 두고 민족혁명을 제1차적 과제로 한 연속적인 2단계 혁명노선을 취하였으며, 독자적인 한인공산당조직의 건설을 지향하였다.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한 1단계혁명론의 노선을 채택하였고, 러시아공산당에 가입한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볼셰비키의 지휘와 감독을 당연시하였다. 민족운동 기반이 취약한 이르쿠츠크파는 상해임정과 대립관계에 있던 국민의회세력과 연합하였다.
상해의 고려공산당대회는 박진순, 홍도와 함께 선생을 모스크바 파견대표로 선정하였다. 1921년 6월 19일 상해를 떠난 선생은 인도양, 수에즈운하, 지중해, 알프스 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 만인 10월 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였다. 선생이 이끄는 대표단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면담하고 자유시참변을 비롯하여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불법적 활동과 전횡을 설명하였다. 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 검사위원회는 상해, 이르쿠츠크 양파의 주장을 검토하고 11월 15일자로 결정서를 발표하였는데, 선생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다. 이 결정서에 따라 이르쿠츠크 군감옥에 갇혀 있던 상해파 당간부들과 자유시참변 당시 체포된 장교와 병사 80여 명이 석방되었다.
1921년 12월 선생은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자격으로 홍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당국자들과 파쟁의 중단과 연합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합의하였다. 또한 당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극동노력자대회)에 참여할 조선대표단의 집행위원회 간부들과도 회합을 갖고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 구성안에 합의하였다. 합의된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는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5개 민족그룹인 조선대표단, 고려공산당중앙위원회, 상해의 국민대표회준비회, 상해임시정부, 국민의회의 대표 20인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1922.1.21~2.1)에서 슈미야츠키와 김규식과 한명세가 이끌던 조선대표단 집행위원회가 선생의 대리인으로서 모스크바에 남아있던 박진순의 대회참여를 저지하고 숙소인 룩스호텔에서 축출하는 등 상해파를 철저히 배제하고 대회를 자파 위주로 진행하였다. 모스크바로 귀환한 선생은 슈미야츠키와 조선대표단의 파당적 행위에 분노하여 대회의 선언서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였으며, 이르쿠츠크에서의 모든 합의사항을 백지화하였다.
결국 상해와 이르쿠츠크 양파의 연합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의 고려공산당연합대회(1922.10.19~10.28)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어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1923.1~6) 역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창조파, 개조파로 분열되었다. 결국 윤해, 원세훈 등 국민의회계열 인사가 중심이 된 창조파가 한형권이 가져온 모스크바자금의 잔금 20만 루블을 활용하여 대회를 주도하였다.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국제공산당의 승인과 자금을 얻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결국 추방되고 말았다. 선생은 국제공산당이 고려공산당 해산 후 1923년 초 조직한 꼬르뷰로(Korbureau)내에서 창조파의 국민위원회를 지지한 국민의회파의 한명세와 대립하였다.
차가운 러시아 벌판의 혁명가로 숨을 거두다
선생은 1923년 말 한명세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꼬르뷰로 위원을 사퇴하였고, 이어 국제공산당은 1924년 초 꼬르뷰로를 해산하고 고려공산당 창립을 목표로 한 오르그뷰로(Orgbureau)를 조직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선생은 ‘원동해방전쟁’에 참여했던 추종자들이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조직한 적기단(赤旗團)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1925년 4월 이르쿠츠크계열의 화요파가 단독으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대표단을 파견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신청하자, 국제공산당은 선생에게 승인여부를 물었다. 선생은 국내에 있던 동지 김철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승인의사를 보냈다. 그리하여 1926년 초 재건된 2차 조선공산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연합한 것이었다. 1926년 가을 새로운 파벌로 등장한 ML파의 3차 조선공산당에 대항하여 1926년 말 서울‧상해파 연합의 조선공산당(춘경원당)이 성립되자, 선생은 서울·상해파의 대표로서 6차 코민테른대회에 파견되기도 했다.
선생은 말년에는 원동변강(遠東邊疆, 연해주지역)의 모플(MOPR ; 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모플의 목적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활동에 있었다. 원동변강 모플위원회는 선생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원동변강 모플 열성자대회에서 훈장을 수여하는 등 여러 차례 표창하였다. 선생은 모플 활동을 위해 스찬 지방을 방문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던 도중, 강한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1935년 1월 31일의 일이었다.
선생은 분명 러시아식 공산주의를 답습하여 이를 우리나라 혁명에 그대로 적용하고자 했던 이른바 정통공산주의자의 범주와는 거리가 있던 인물이었다. 동양혁명의 책임자로서 한인공산주의운동에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제공산당의 젊은 볼셰비키들이 선생을 ‘비공산주의적이며 심지어는 반공산주의적 요소’를 지닌 인물로 평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반대파였던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족해방을 제1차적인 과제로 설정하였으며, 한말 이래 민족운동의 전통과 경험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주류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젊은 볼셰비키들에게 종속되거나 휘둘리는 것을 거부했다.
선생은 또한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다. 선생은 조국광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했던 부류의 정치가는 더욱 아니었다.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는 선생의 진보적 행동성과,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을 과감히 개혁코자 했던 혁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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