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과 금성대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차 두 대가 어깨를 겯고 지나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길을 따라 조심스레 차를 몬다. 그럭저럭 길의 형태를 유지하던 도로는 정상까지 10분 남짓한 거리를 남기고 돌연 비포장으로 그 모습을 달리한다.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도로 여기저기에 깊은 고랑이 생겨 적잖이 애를 먹인다. 태백과 소백을 이어준다는 그 상징적 의미에서 오는 이름값이라고 해야 할까. 고치령은 호락호락 그 모습을 내보이기 싫은가 보다.
그렇게 올라선 고치령의 모습은 생각보다 조금은 밋밋하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뭘 기대했을까. 정선의 만항재에서 만난 멋진 설경이나 동해와 삼척이 한눈에 들어오던 댓재의 장쾌한 풍광에 견줄 만한 뭔가를 기대했던 걸까. 솔직히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실 모두 같은 백두대간이지만 이들 두 고개에 비하면 고치령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광이라는 게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속내에 담긴 역사의 흔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과는 그 깊이가 다르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에 오른 단종의 서글픈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고, 그의 복위를 꿈꾸던 금성대군의 마음도 그러했을 터이니 말이다. 뒤틀린 세상을 원망하며, 또 그것을 바로잡고 싶었던 이들의 열망과 좌절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고치령이다.
고치령 정상에는 한 칸짜리 아담한 산령각(서낭당)이 자리해 있다. 단종을 태백의 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의 신으로 모신 이곳 산령각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험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명산 중의 명산으로 꼽히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몸을 섞는 곳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싶다.
영남의 고도(孤島), 마락리
고치령 정상에서 마락리(馬落里)까지는 오를 때와는 달리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번갈아 이어진다. 내리막길은 시작부터 경사가 만만치 않다. 덕분에 오를 때와는 달리 핸들을 잡은 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변속기 레버를 저속으로 옮기고 속도를 낮춘다. 그제야 고치령 정상에서 의아한 기분으로 한참을 들여다봤던, 전봇대에 큼직하게 새겨져 있던 전화번호가 떠오른다. 왜 인적 드문 그곳에 카센터와 콜택시 전화번호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는지.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의 경계에 자리한 마락리는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에 자리해 있다. 길도 꽤 험하다.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의 말이 자주 떨어져 마을 이름까지 마락리가 되었다고 하니, 그 험한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을로 들어섰지만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산뿐이다. 왜 이곳을 영남의 고도라 하는지 이해가 간다. 마락리 주민들은 이 산에 기대어 살아간다. 산에서 더덕도 캐고 산을 깎아 만든 자그마한 밭에서 배추와 무도 키운다. 그렇게 자식을 공부시켰고, 자신의 삶을 영위해왔다. 누군가에겐 험하기만 한 이 산이 이곳 주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삶의 터전인 셈이다.
마락리의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마락분교이다. 마락리에서 가장 큰 건물인 마락분교는 도로변 한가운데 자리해 있다. 마락리의 유일한 초등학교였던 마락분교는 지난 1991년에 폐교돼 지금은 '마락청소년야영장'으로 이름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 모습만은 옛날 그대로다. 아니, 조금 더 세련되어졌다는 표현이 옳을지 모르겠다. 한여름 피서객들을 위한 야영장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이야 무엇이든, 그래도 여느 지역의 폐교들처럼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