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화장실 유적이다. 삼국시대 최초의 화장실일 뿐 아니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모두 3기의 화장실터 가운데 가장 큰 곳은 길이 10.8m, 폭 1.8m에 이른다. 화장실 유적에서는 회충, 편충 등 기생충 알과 함께 독특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일명 화장실 뒤처리용으로 불리는 뒷나무, 즉 측주다. 1,300여 년 전 백제인들은 화장실에서 종이 대신 측주를 사용했는데, 이 측주는 길이가 25~30cm 정도이며, 끝부분이 둥글고 매끄럽게 처리되어 있다. 측주를 사용해 뒤처리를 하는 모습은 각자 상상에 맡긴다.
왕궁리 유적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사찰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탑이 세워진 시기도 의견이 분분하다. 시대가 어떻든 8.5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이 석탑은 왕궁리 유적을 사방으로 돌아가며 둘러봐야 제맛이다. 특히 서편으로 해가 떨어질 때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석탑의 실루엣이 가히 장관이다.
백제의 꿈, 새롭게 태어나는 익산 미륵사지
익산 미륵사지는 어느 나라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백제 최대의 가람이며,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한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만 하더라도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에 여러 고을의 복을 빌던 절을 명찰로 대신 지정하는 기록이 보이지만, 조선 정조 때의 문인 강후진의 [와유록]에 나오는 [유금마성기] 편에 ‘미륵사는 100여 년 전 폐허가 됐으며, 7층으로 남아 있는 석탑의 옥개석 위에 사람이 올라가 낮잠을 즐긴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걸로 봐서 미륵사의 폐사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는 오랜 세월 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 보수와 함께 실측이 이뤄졌다. 하지만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허접한 보수 공사에 불과해 오히려 흉측한 몰골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익산 미륵사지는 1974년 동탑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80년부터 미륵사지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1992년 미륵사지 동탑 복원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2001년에는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이 결정되었다. 복원된 동탑 옆에 서 있는 커다란 가설 덧집이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공간이다. 석탑을 해체하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해체가 마무리될 무렵 귀중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석탑 1층 심주석 중앙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가 그것이다. 특히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하고 탑을 세웠다는 기록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미륵사의 창건 배경과 창건자, 건립 연대 등이 명확하게 규명되었다. 하지만 늘 사실처럼 붙어 다니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거기에 없었다. 금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사람은 좌평인 사택 적덕의 딸이자 백제 무왕의 왕후이기 때문이다.
익산 미륵사지를 보려면 먼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1997년에 개관한 이 전시관에서는 창건에서 폐찰까지 미륵사지의 역사뿐 아니라 1만 9,000여 점에 이르는 출토 유물 가운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금제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는 실물 크기로 복제해 전시하고 있으며, 2000년에 출토된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도 만날 수 있다. 미륵사지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도록 관람로를 조성해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 2기의 당간지주, 연꽃무늬를 새긴 석등받침과 지붕돌인 옥개석 등 미륵사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흔적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