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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승산(斗升山·443.5m)

문성식 2012. 11. 13. 20:33

전북 정읍시
들판에 우뚝 서서 민초를 품어 온 호남의 영산

글 / 사진  이갑수 기자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대지의 푸른 초원을 휘달리다 논에서 일하는 농부 이마에 흐른 땀방울을 훔쳐준 뒤, 호남평야에 우뚝 선 두승산 기슭에 올라 잠시 쉬어간다. 막힘없이 펼쳐진 호남평야는 옛적부터 농민들의 마음을 유순하게 만들어주었고, 호남 농민들은 매사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일군 땅의 소산을 먹으며 자족하며 살아왔다. 산출되는 풍부한 곡식 때문에 민초가 유린당하던 시기엔 녹두장군이 홀연히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싸우기도 했다.
두승산(斗升山·443.5m)이란 이름은 다른 곳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斗)는 곡식이나 액체, 가루 따위를 잴 때 쓰는 ‘말’을 의미하고, 승(升)은 말의 10분의 1단위인 ‘되’를 나타낸다. 과거 두승산 정상에는 돌로 된 되와 말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1883년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망가져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취재산행은 입석리 버스정류장부터 시작하여 입석리 저수지와 두승산성을 지나 내천을 거슬러 말봉에 이르고, 다시 서쪽 능선으로 이동하여 유선사에 들른 후, 입석리 저수지로 원점회귀하는 길로 다녀왔다.

유선사는 산하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주능선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 이와 같이 암자가 산 꼭대기에 있는 경우는 드문 경우다.

 

나지막한 우리네 서민 인생과 비슷한 두승산
29번 국도변 입석리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려 내천을 따라 쭈욱 올라가니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마치 아카시아와 흡사한 향내가 물결치는데, 알고 보니 길가에 피어난 보랏빛 칡꽃이 한창이었다. 저수지 왼편 길을 따라 걸어 갈수록 소나무가 점점 우거지며 매미들이 늦여름이 아쉬워서인지 목 놓아 울어재낀다. 등산을 시작한지 10분도 안되어 두승산성(斗升山城) 서문터를 지난다. 승고산성(升高山城)이라고도 불리는 두승산성은 <중보문헌비고>에서는 3한 시대의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사적 역할을 담당했던 두승산성의 둘레는 총 1만8백11척(약3.28km)으로 그 규모가 상당했다. 그러나 현재 산성 대부분은 관리소홀로 유실되었으며, 지역민에 의하면 8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많은 돌들이 주변 공사장으로 유출되었다고 한다. 유서 깊은 두승산성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철저한 관리가 시급한 실정이다.
두승산성을 지나 계곡에 들어서니 작년 장마 이후 정비된 석축이 눈에 띈다. 잘 닦아놓은 석축이 튼튼해 보이긴 하나 너무 인공적인 모습이다. 계곡을 따라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등산로를 만났다. 솔숲에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한 나무향기가 발걸음을 더욱 경쾌하게 만든다. 등산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의 발을 타지 않은 듯 바닥에는 풀이 듬성듬성 나있으나 잘 닦여진 탓에 등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등산로는 30여분이 지나서도 사복사복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였다. 등산로 우편으로 장끼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산 저편으로 푸드득 날아간다. 등산로 중간에 나리꽃과 칡꽃도 만개하였고, 장수풍뎅이와 잠자리들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두승산은 화려하고 웅대한 산은 아니지만, 나지막한 우리네 서민 인생과 비슷하며 착하고 순한 동네 불알친구를 닮은 구석이 있다. 흐뭇한 마음에 등산화로 찰진 대지에 솔잎을 푹푹 비벼가며 산길을 음미하듯 걸어간다.
꾸준히 40분간 걸었을까? 산중턱 즈음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우측은 노적봉으로 향해 다시 입석리 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고, 바로 직진하는 길은 만수동을 거쳐 두승저수지로 이어지며, 좌측길이 주능선에 위치한 정상에 도달하는 길이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맞은편에서 시원스레 불어오는 산바람에 말려본다. 집에서 싸온 시원한 보리차로 입을 간단히 축이고,  오이를 바지춤에 슥슥 문질러 한 입 베어 문다. 일행과 담소를 나누며 잠시 숨을 고른다.
엉덩이를 털어내고 다시 길을 간다. 여기저기에 돋아난 버섯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먹을 수 있는 버섯 몇 개를 따서 탈탈 털어 가방에 넣고 다시 길을 오른다. 어른 키를 넘겨 자라난 시누대밭을 지나는 순간 멀리서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어댄다. 시누대밭을 넘어 사태구간이 나타나는데 마치 성벽처럼 층층이 쌓인 돌들의 계곡을 지나 올라간다. 처음에는 주먹만 한 돌로 이루어진 등산길이 나타나더니, 나중엔 굵직굵직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에 다다른다. 계곡에 서서 산하를 내려다보니 고부면과 멀리 줄포, 변산 앞바다까지 보인다. 산을 오르며 들판과 먼 바다까지 즐길 수 있는 것이 두승산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닌가 싶다. 계곡을 벗어나니 무언가 새파란 풋 열매가 맺힌 나무가 나온다. 무언가 하고 빤히 바라보니 바로 돌감나무다. 야생에서 자란 돌감나무에는 꽃사과보다 약간 큰 감이 맺혀있다. 아직 한 여름 8월이기에 열매는 보나마나 땡감이다. 땡감 돌감나무를 뒤로하고 올라가자 조그마한 무명암자가 나온다. 스님 홀로 참선을 하는 초막인데 스님은 어디에 가셨는지 뵈질 않고, 빈 암자를 향나무 연기 홀로 지키고 있다. 암자 뒤편에는 스님이 기르시는지 ‘양하’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양하는 생강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전라도에서는 ‘양엣간’이라 불리며, 봄 또는 가을에 올라오는 검지 손가락만한 새싹을 잘라서 나물로 무치거나 소고기산적 사이사이에 끼워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독특한 향기와 쌉싸름한 뒷맛은 미식가들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계곡을 따라 주능선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이 아름답다.

 

암자 뒤편에 있다는 샘터로 걸어간다. 졸졸졸 흐르는 샘은 붉은색 대야에 모이고 있다. 바가지를 꺼내어 흐르는 물을 받아 꿀꺽꿀꺽 마시고 남은 샘물로 세수하고 나니 더위가 한결 가신다. 잠깐 앉아 쉬려다가 정상이 코앞이라는 말에 다시 일어나 길을 간다. 5분쯤 등산로를 오르니 이정표가 놓여있는 주능선에 다다른다. 좌측으로 가면 유선사가 나오고, 우측으로 50m가면 정상기점인 말봉에 다다른다.
이정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말봉에 다다른다. 시원하게 펼쳐진 주변 경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북쪽을 비롯한 사방이 확 트여 호남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주능선을 따라 북서쪽에는 정읍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찰인 유선사가 있으며, 서쪽에는 변산반도 칠산바다가 수평선에 맞대어 보인다. 동쪽으로는 정읍시가지와 그 너머 내장산이 보이고, 내장산 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입암산과 방장산이 병풍처럼 정읍을 두르고 있다. 호남평야를 내달린 바람이 두승산 기슭을 타고 시원하게 불어온다. 말봉 정상에 있는 바위에는 돌 되와 돌 말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 지역 유지였던 동초 김석곤 선생이 새긴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오른편에는 신선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망선대(望仙坮)가 있다. 수두목승(水斗木升)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물과 같이 많고 큰 것을 다룰 때에는 말(斗·두)과 같은 큰 단위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 흐름을 읽어야 하고, 나무나 곡식과 같은 작고 한정적인 것을 다룰 때에는 되(升·승)와 같은 작은 단위로 미시적인 관점에서 세세하게 살펴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걸어왔던 길을 따라 다시 주능선을 통해 이정표를 지나간다. 유선사와 말봉 사이는 1km 미만의 거리로 그 고도가 고만고만하니 걷기에 부담이 없다. 주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이동하던 중 원통암 석각(圓通庵 石閣)을 지나게 된다. 과거에 원통암이라는 암자에 있던 독집인데 조선 정조 때의 <영주지(瀛州誌)>에는 이 자리에 유명한 석불좌상과 비석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암자도 석불좌상과 비석도 사라지고 없다.

 

도솔천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수령이 수백년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고목나무를 지나 시누대밭을 넘으니 아담한 바위사이 길이 보인다. 양쪽에 놓인 바위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나누고 있는 듯 하다. 일주문 같은 바위사이를 지나면 유선사 뒤편이 나오는데 호남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유선사는 조계종을 따르는 절로 대웅전과 종각, 석불, 본 건물로 나뉘어 있다. 본 건물에는 스님들과 암자에 기거하는 고시생 및 암환자 분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 대웅전 왼쪽 언덕에는 4~5m는 족히 됨직한 백호가 있는데, 이는 1881년 유선사가 폐사직전에 있을 때 한 지관의 ‘풍수지리상 대웅보전을 싸고 내려운 지맥이 청룡은 길게 뻗어 내려온 반면 백호가 끊긴 형국이라 우백호의 기운을 호랑이 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세웠다고 한다.

 

조용한 산사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산을 한다. 하산길은 유선사에서 남서쪽 능선을 타고 입석리 저수지로 가게 되는데 1.2km 정도의 약간 가파른 길로 35분 정도 소요된다. 능선을 타고 내려갈수록 정상에서 보았던 산하 마을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구불구불 산 허리춤에 피어난 나리꽃을 지나 어른 키보다 큰 시누대밭의 사이로 발걸음 가볍게 내려간다. 입석리 저수지 부근 묘지에 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그 사이로 마을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쪽빛 하늘과 붉은 백일홍 그리고 푸르른 솔숲의 색들이 엉겨 하나의 아름다운 세상을 이룬다. 입석리 저수지 하단에 위치한 수련원인 ‘황토현 푸른터’에 연꽃들이 피어나 있다. 진흙 속에서도 본연의 향기를 잃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을 가슴 속에 고이 담아 산을 내려간다.  ⓜ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솔숲, 백일홍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