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그늘 아래서 반투명 햇볕만 받은 이끼가 스멀스멀 계곡으로 퍼져있다. 한 쌍의 연인이 그 숲으로 들어간다. 뿌리 드러난 좁은 산길의 뜻하지 않은 어둠이 두려웠는지 그들의 걸음이 쭈뼛하다. 숲과 계곡이 여름 초입에서 푸르고 깊다.
국경의 밤, 경계의 긴장이 삼엄한 그곳에도 초록으로 깊어가는 숲의 싱그러움이 있었을 터. 천년 하고도 수백 년도 더 지난 오래된 6월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수승대, 이곳이 그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백제의 사신이 신라로 떠날 때 수승대에서 마지막 환송을 했고, 그때 그들은 이곳을 두고 사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며 근심 ‘수’자와 보낼 ‘송’자를 써서 ‘수송대’로 불렀다. 우리는 지금 ‘옛 국경의 밤’에 서있는 것이다. 국경을 감시하는 초병의 삼엄한 눈길 대신 밤을 새워 이야기꽃을 피우는 젊은 남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밤을 밝히고 있었다.
휴식·역사가 함께하는 수승대 ‘국민 휴양지’
수승대는 역사 유적지며 국민관광지다. 넓은 냇물 한가운데가 어른 가슴 높이도 안 찬다. 고무보트를 타고 노는 아이와 아빠 모습도 보이고, 기세 좋은 아이들은 수영실력을 뽐내며 물속으로 잠수했다가 저쪽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런 물놀이장 건너편에는 나무그늘 아래 텐트장이 있다. 몇천원만 내면 텐트를 치고 하룻밤 잘 수 있다.
아이와 함께 온 가족, 젊은 남녀 십여명이 어울린 모임, 봉고차를 타고 온 나이 드신 분들하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길바닥에 돗자리를 깔거나 텐트촌에 텐트를 치거나 물가 민박집을 잡고 여장을 푼다. 한나절 놀다가는 사람도 있고 하룻밤 혹은 이틀 밤을 묵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
- ▲ 1. 요수정과 그 앞으로 흐르는 수승대 물줄기. 2. 요수정으로 건너가는 구름다리.
수승대, 그곳에는 아직도 암반바위 위로 세찬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물줄기가 빚어놓은 바위의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오래된 국민관광지의 관록을 간직하고 있다. 용솟음치는 물보라가 마른 바위를 적시고 계곡 물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집채만 한 바위를 휘감고 흐르는 푸른 물줄기가 계곡을 품은 숲의 푸르름과 닿았다.
경치 좋은 곳에 세워진 정자에는 반드시 이야기 하나쯤은 전해 내려오기 마련이다. 수승대에는 요수정과 구연서원의 흔적이 역사의 이야기를 품고 남아있다.
요수정은 요수 신권이 1542년 세운 정자다. 당시에 정자 자리는 지금과는 다른 자리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05년에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요수정을 비롯해 관수루, 내삼문, 전사청, 정려 등 옛 역사의 흔적과 함께 인근 계곡 일대를 일컬어 수승대라고 부른다.
‘수승대 국민관광지’로 알려진 ‘수승대’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이 지었다. 원래는 요수 신권이 대의 모양이 거북을 닮았다 하여 ‘암구대’로 부르고 그 인근지역을 ‘구연동’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퇴계 이황이 이곳의 이름을 ‘수승대’라고 고칠 것을 권유했고 신권은 그 뜻을 받아들여 ‘수승대’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
- ▲ 1. 바위 위에 세워진 관수루. 2. 관수루 굽은 기둥이 인상적이다.
수승대 계곡의 푸른 물줄기 앞에 ‘관수루’라는 문루가 서있다. 구불거리는 나무에 손대지 않고 문루의 기둥을 세운 모양에서 옛 정취가 느껴진다. 어떤 기둥은 바위 위에 그냥 세웠다. 그런 문루를 한눈에 봤을 때 옛것에서 풍기는 멋이 묵직하다. ‘관수루’의 또 다른 멋은 그 이름에 깃들여 있다.
조선의 학자인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등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들이 구연서원을 세웠는데, 그 문루가 바로 ‘관수루’다. 이 관수루의 ‘관수’란 <맹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름 그대로 관수란 ‘물을 보다’ 정도로 풀어 쓸 수 있는데, 맹자는 ‘물을 보는 데도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둔 것이다. 이는 군자의 학문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이니 자연을 빗대어 인간의 기상과 깊이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옛사람들이 낫다 싶다.
그런 이야기를 되새기며 돌아보는 수승대의 기암괴석과 암반바위 위를 흐르는 물줄기, 물가의 정자, 소나무 한 그루까지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
- ▲ 금원산 자연휴양림 통나무집 가는 길.
금원산자연휴양림은 수승대에서 자동차로 5~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휴양림은 금원산 품에 안겨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 남으로 치달으면 기백산과 남덕유산 등으로 이어진다.
1331미터의 기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그 높이도 높이려니와 산세가 뿜어내는 경치가 장관이다. 이런 금원산은 두 개의 계곡을 품고 있는데 그 하나가 성인골 유안청계곡과 지재미골이다. 이 중 유안청계곡은 조선시대 이곳 출신 선비들이 학문을 익혔던 곳이다. 푸른 자연 속에서 학문을 익히는 젊은 선비들의 기개가 남아 아직도 푸르른 숲의 향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안청폭포 아래는 자운폭포가 있는데 절벽 같은 바위 위로 수십 미터의 물줄기가 흘러내리는데 그 소리와 모습이 장관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금원산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하나같이 재미있다. 그 중 한 이야기는 금원숭이와 얽힌 이야기다. 옛날도 아주 옛날 이곳에 금원숭이가 살았는데 그 성질이 걷잡을 수 없이 하도 날뛰어 한 도승이 금원숭이를 잡아 바위에 가두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 전설의 증거가 되는 바위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 모양이 원숭이 얼굴처럼 생겨 ‘낯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밖에도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담과, 반전이라는 사람이 왜구를 피해 아버지를 업고 무릎으로 기어 산을 올랐다 하여 이름 붙은 ‘마슬암’ 등이 있다. 전설이 담긴 푸르른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행길이 5개가 있는데 그 중 휴양림에서 출발하여 휴양림으로 돌아오는 코스는 2개다. 그 중 한 코스는 휴양림관리소를 출발하여 유안청폭포를 지나 능선을 타고 동봉을 지나 금원산 정상에 오른다. 이후 북능을 타고 지재미를 지나 문바위를 거쳐 다시 관리소로 내려오는 길이다. 약 12킬로미터 산행 코스다. 보통 5시간 코스로 알려졌다.
굳이 등산을 하지 않더라도 휴양림 관리사무소부터 용폭, 자운폭, 유안청폭포를 지나 약간의 산행 후 다시 갔던 길로 내려오는 산책을 즐기는 것도 괜찮겠다. 이 길에서 만나는 계곡과 폭포 숲 등 풍경이 금원산 등산에서 볼 수 있는 백미의 풍경 중 하나기 때문에 등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무리 없는 산책코스를 권장할 만하다.
비에 젖은 휴양림 숲은 명쾌한 녹색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휴양림 입구 계곡에 돌을 쌓아 만든 물놀이장에는 비오는 날에도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하는 가족들이 몇몇 보인다. 이끼 낀 돌멩이가 계곡을 따라 여기저기 쌓여있고 돌과 돌 사이로 흐르는 계곡 물이 맑다. 입구가 이 정도니 더 높고 더 깊은 숲의 계곡은 어떨까?
곤두박질치는 폭포수 물줄기 ‘시원’
마음을 사로잡은 곳이 자운폭포였다. 물소리가 들리는 숲으로 내려갔다. 젖은 숲길은 미끄러웠다. 나뭇가지를 잡고 조심조심 내려간 그곳에는 벼랑도 아니고 산도 아닌 거대한 바위의 비탈면을 타고 세차게 흐르는 폭포가 있었다. 폭포 위에서 부는 바람과 미끄러운 물이끼 때문에 비틀거리며 조심조심 물줄기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돌아왔다. 접근금지 푯말의 긴장감이 그때서야 느껴졌다.
-
- ▲ 금원산 자연휴양림 등산로 풍경. 숲도 푸르고 물도 푸르다.
폭포는 길가에 있었지만 폭포 안으로 들어가면 길은 사라져버린다. 숲 속에서 통쾌하게 곤두박질치는 폭포의 물줄기는 숲의 향기를 머금어서인지 푸르게만 느껴졌다. 그 푸른 물줄기가 들끓는 내 속으로 들어와 열기를 식혀준다.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벌써 숲을 나간 모양이다. 나 혼자 폭포의 끝으로 올라가다보니 일행을 돌아보지 못했다.
올라갈 때보다 더 조심조심 내려와야 했다. 한 발만 헛디디면 폭포수를 타고 십수 미터 바위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다. 휴양림에서는 그런 계곡 물가에 텐트를 치는 나무마루를 마련해놓았다. 아슬아슬한 휴식이다. 하기야 살아가는 게 면도날 같은 사람들의 하루하루에 비하면 숲 속 폭포 가의 그런 휴식은 안식이다.
유안청폭포 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니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숲길은 어두웠다. 이끼가 스멀스멀 퍼져있다. 흙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가 얽혀 구불거리는 뱀 같다. 푸른 잎에 걸러진 햇볕은 반투명으로 숲 속을 밝힌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길과 나무 돌뿌리를 밟으며 조금씩 숲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연을 멀리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분위기가 낯설 것이다. 한 쌍의 연인이 그 숲으로 들어간다. 뿌리 드러난 좁은 산길의 뜻하지 않은 어둠이 두려웠는지 그들의 걸음이 쭈뼛하다.
눈길을 돌렸다. 바위경사면 위로 물줄기가 쾌속으로 흐른다. 나뭇가지가 물줄기에 닿을 정도로 휘어져 내렸다. 푸르름을 한껏 머금고 한여름을 마음껏 누리는 푸른 단풍나무 가지가 계곡 물 위로 커튼처럼 휘어졌다. 이곳에서는 숲도 푸르고 폭포에 이는 바람도 푸르고, 바위 위를 굴러 푸른 웅덩이로 떨어지는 부서지는 물줄기 또한 푸르다. 우리는 온통 푸르른 이곳에서 시원하게 부서지는 여름을 보았다.
여|행|길|라|잡|이
♣ 가는 길
● 수승대: 서상 IC·서상 방면 - 영각사·황점 - 북상 방면 37번 지방도·북상면사무소 앞 위천 방향 - 위천수승대(30분정도 소요)
● 금원산자연휴양림: 지곡IC - 우회전 - 안의금천사거리에서 직진 - 교복삼거리에서 직진 - 마리삼거리에서 좌회전 - 장풍삼거리에서 좌회전 - 좌회전 - 휴양림
*대중교통은 거창에 도착 후 수승대국민관광지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가 드물다.
♣ 숙박
● 수승대:
수승대에는 모텔과 민박집 등이 있다. 민박집은 시골집에 방 하나 얻어서 하룻밤 잔다고 생각하면 된다. 보다 편안한 잠자리를 원하면 금원산자연휴양림 통나무집을 예약하는 게 좋다.
● 금원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www.greencamp.go.kr)를 통해 인터넷으로만 예약 가능하다.
♣ 먹을거리 수승대관광지에 식당이 몇 곳 있다. 백숙, 메기탕, 비빔밥, 육개장, 냉면 등을 판다.
♣ 기타·문의 수승대에는 입장료와 주차요금을 받는다. 금원산자연휴양림도 숙박을 하지 않고 휴양림 시설을 둘러보려면 약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수승대 관리사무소 : 055-943-5383. 금원산자연휴양림 : 055-940-3574. 055-942-3633
/ 이코노미플러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