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3
성경 이야기-3
C. 3부
14. 오리겐과 성경 부패
'소수 본문'의 원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국지적 본문'입니다.
가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명령에 따라 50개의 성경 사본을 만들었습니다.
불행이도 유세비우스는 순수한 본문이 남아 있는 안디옥으로 가지 않고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학자들이 쓴 수정판을 얻었습니다.
유세비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간 이유는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입니다.
오리겐의 정식 본명은 아드만티우스 오리게네스(A.D. 185~254)으로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오리겐을 위대한
신학자요 가장 영향력 있는 성경 학자로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리겐은 실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성경을 뜯어 고친 성경 부패와 잘못된 교리의 장본인입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젊은 나이에 교사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오리겐이 17세때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A.D.)가 박해를 일으켰고, 이때에 아버지가 투옥되어 결국
순교했지만, 오리겐은 어머니의 만류로 순교하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교장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를 계승하여 A.D.
203년에 18세의 나이로 교리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오리겐은 수 많은 책을 모으고 수천권의 책을 저술할 정도로 천재였고, 열정적이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였던 암브로스의 책들을 소장했고, 신 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커스 밑에서 공부하면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맨 땅에서 잠을 잘 정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였습니다.
오리겐은 교리학교에서 하루종일 가르쳤고 밤에는 성서를 연구하는 일로 지샜고, 수면은 최소한으로 취했습니다.
오리겐은 약 6000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중요한 책으로는 여섯개의 언어로 된 구약성서를 모아 각 구절을 대조한
유명한 '헥사플라'(Hexapla), 각종 성경주석들, '제1원리'(De Principiis:이 책은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단 셀수스를 반박하여' 등이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오리겐은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그대로 믿지 않고 비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의 성서해석 방법은 철저히 알레고리적(풍유, 은유적)이었고 항상 현상적(physical) 해석을 너머 영적 해석에
더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는 주기도문을 읽을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부분을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읽었습니다.
오리겐은 '성경이란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겐 거의 쓸모가 없다.'라고 말함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느끼는 바가 곧 성경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리겐은 감독에 의한 죄의 용서 즉 감독의 사죄권을 말하기도 했으며, 세례를 중요한 구원의 표지로 생각했는데,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리겐은 전통 교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은데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기사를 부인했고, 영혼이 영원한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으며(영혼 선재설), 별들과 행성들도 혼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고등 생명이나 하등 생명으로
귀속된다는 혼의 윤회를 믿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악한 자도 형벌을 받은(연옥에서의) 후에는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을 믿었는데 심지어는
마귀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리겐은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이 전천년주의자(chiliasts)였던 반면 후천년설을 지지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A.D. 232년에 가이사랴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 버금가는 학교를 세웠고, 데시우스트라얀 황제의 박해로
인해 가이사랴에서 A.D. 254년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b) 맛소라 본문과 70인역
오리겐의 대표작인 헥사플라에 대해 알기 위해선 먼저 맛소라 본문(MT)과 70인역(LXX)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맛소라 본문(Massoretic Texts)은 주후 450년 이후 정착된 유대인 고유의 히브리어 구약성경입니다.
70인역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알렉산드리아의 70명 또는 72명의 유대인 번역자(장로)가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번역자들이 100년 이상 걸려서 번역한 것입니다.
기원전 2-3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자기들의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70인역 구약성경은 주후 450년 이후 정착된 히브리 성서인 맛소라본문(Massoretic Texts; MT)에 없는 경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이를 외경(apocrypha)이라고 부릅니다.
70인역 번역자들은 언어학이나 번역이론에 대한 인식 없이 번역했기 때문에 번역 기술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사용했다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번역에 임했습니다.
70인역은 문자적 번역과 의역을 병행했는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의역을 하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
의미가 불분명해질 정도로 지나치게 문자적인 번역을 고집하기도 하였습니다.
번역작업에 있어 그들은 의식적인 번역철학이나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고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미 전달”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규정짓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 이전에 존재했던 사본을 이해하지 못했고, 잘못 읽기도 하였으며, 틀린 모음을 붙이거나,
히브리 원본(Vorlage)의 단어들을 잘못 분할하기도 했습니다.
70인역에는 때로는 맛소라 본문보다 적은 양의 책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70인역의 예레미아서는 맛소라 본문의
예레미아서보다 1/8이 적습니다.
70인역은 카톨릭 성경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개신교에서도 정경의 범위에서 맛소라본문을, 책배열 방식으로는 70인역
구약성경을 따르고 있습니다.
b) 헥사플라와 구약성경의 변개
헥사플라(6주성경)는 여섯 개의 난에 여섯가지 언어로 구약성경 역본을 담은 책입니다.
헥사플라는 6500페이지, 50권의 매우 큰 책으로 A.D. 25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오리겐은 7명의 속기사와 7명의 필사관과 함께 일했습니다.
첫 번째 난은 히브리 본문으로 맛소라 본문과 거의 같습니다.
두 번째 난은 히브리어를 소리나는대로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난은 아퀼라(기독교로 회심한 후에도 점성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감)가 A.D. 128년에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습니다.
네 번째 난은 시마쿠스가 A.D. 200년에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난은 오리겐이 주도해 만든 70인역으로 그리스어 역본입니다.
여섯 번째 난은 테오도티온이 A.D. 180년에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습니다.
헥사플라는 A.D. 638년까지 가이사랴의 도서관에 있었으나 그 뒤 모슬렘의 침략으로 원본은 소실되었습니다.
헥사플라는 일부분만 복사되었고, 다섯 번째 난인 70인역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에프레미 사본' 등에 남아 있습니다.
c) 성경 본문 변개에 미친 오리겐의 영향
오리겐은 '가정하여 수정하는 기법'이란 기법을 이용하여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는 성경 구절을 마음대로
뜯어 고쳤습니다.
즉 성경을 그대로 필사하거나 번역한 것이 아니라 소설책 쓰듯이 자기 생각에 부합되게 내용을 삭제하거나
변개하였습니다.
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 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 버리시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재앙이 임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삭제하면 그는 생명책의 이름이 지워지고 모든 축복까지 뺏기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실제로 킹 제임스 성경을 만들고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대영제국은 중세 이후 세계를 누비며 번성하였지만
웨스트 코트와 호르트가 변개된 '영국 개역 성경'을 만든 19세기 후반 이후로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근대에 번역된 변개된 성경은 주로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근거하는데 두 사본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류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의 저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위해 가아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50권의 그리스어 성경을 주문했고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이 50권중 2권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그동안 오래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위를 인정받아 왔는데, 이는 이들 책이 당시
값 비싼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벨룸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의 기초가 된 '다수 본문'의 수 많은 사본 중 주후 2세기 이전에 쓰여져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페시토 역본'이나 '구 라틴 벌게이트' 또한 발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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