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영혼을 깨우는 벗을 찾으라/법정 스님

문성식 2011. 5. 20. 18:54

      영혼을 깨우는 벗을 찾으라 출가한 사람이 맨 먼저 할 일은 스승을 찾는 것입니다. 먼저 그 길을 간 사람, 먼저 출가수행을 시작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경험자가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경험자를 찾아가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절에 처음 올 때나 교회나 성당에 처음 나갈 때도 먼저 다닌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습니까? 어디에기대야 할지 몰라서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의 조언을 구하듯이, 수행 생활도 실제 수도하고 있는 선배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출가 수행자는 세 가지를 갖추어야 제대로 수행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스승, 함께 수행하는 벗, 수행하는 장소가 그것입니다. 세상 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과 생활환경과 친구를 잘 만나야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 수가 있습니다. 친구 잘못 만나서 신세 망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스승 잘못 두었다가 엉뚱한 길로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생활환경이 맞지 않아서 온갖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와 같이 정신적인 지주와 생활환경과 사귀는 친구가 두루 갖추어져야 합니다. 인생의 행로에는 눈 밝은 경험자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앞서 길을 가면서 터득한 지혜가 뒤따라가는 우리에게 큰 등불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지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지주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의지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지혜를 일깨워 주는 영적인 메아리가 필요합니다. 세속적인 교사와 학생 사이와는 다릅니다. 교사와 학생사이의 매개체는 지식입니다. 등록금을 내고 학점을 이수하는 그런 거래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스승과 제자 사이는 그런 지식의 거래가 아닙니다. 돈거래가 아닙니다. 그 관계에는 지혜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지혜를 일깨우는 일로써 관계가 형성됩니다. 참다운 스승은 말로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는 말로 가르치지만 참다운 스승은 말로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행동으로 몸소 그렇게 보여 줍니다. 일상적인 삶으로써열어 보입니다. 제자는 그 곁에서 항상 새롭게 배우면서 깨닫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도울 뿐입니다. 스승은 입벌려 가르치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 내부의 본질이 꽃피어 나도록 도울 뿐입니다. 따라서 제자는 먼저 스승에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전적인 신뢰와 헌신에 의해서 스승의 인격이 제자에게 메아리칩니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먹을 것을 찾듯이 그처럼 절실하게 찾을 때, 반드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럼 그와 같은 스승은 어디 있을까요? 그와 같은 스승이 절이나 교회에 있을 것이라고속단하지 마십시오. 절이나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직업적인 틀에 박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이나 교회에는 진정한 스승이 귀합니다. 그곳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절에 다닐 때 정신 바짝 차리고 다니십시오. 심심할 만하면 나타나는 우담바라 이야기 들으셨지요? 잘 아시겠지만 처음 듣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원래 우담바라수, 우담바라 나무입니다. 산스크리트어의 우둠바라에서 온 말인데, 과거칠불過去七佛 중 한 분인 구나함모니불이 이 우담바라 나무 아래서 도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또 우담바라 나무에서 피는 꽃을 우담화라고 합니다. 이것은 뽕나뭇과에 속한 무화과의 일종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삼천 년에 한 번씩, 부처님이 출현하거나 이상적인 군주인 전륜성왕이 출현하면 이 꽃이 피어난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극히 드문 일을 비유할 때 우담바라를 듭니다. 그 출처는<법화경>'방편품'의 우담바라 이야기입니다. 곤충이 까 놓은 알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고는 무슨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고 절에서 얼마나 떠듭니까? 심지어 백일기도까지 올립니다. 세상이 얼마나 어수룩합니까? 멀쩡한 사람들이 중들한테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진리를 만나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인지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참 스승은 결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도 만날 수 있고, 시끄러운 시장 바닥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다니는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살아 있는 참 스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스승들은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만큼 탐구하고 열망하면서 간절히 찾았기 때문에, 메아리로서 응답한 것입니다. 스승은 우리 영혼이 늘 깨어 있도록 고무시킵니다. 진정한 스승을 만나고 싶다면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자신의 영적인 자아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또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도량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활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행할 수 있는 주위 환경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입산 출가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속적인 얽힘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조용한 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부모 형제를 여의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다 큰 가족과 보다 큰 세상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큰 가족과 보다 큰 세상을 찾기 전까지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둥이나 대들보가 될 나무는 시중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 나무는 깊은 산중에서 자랍니다. 깊은 산중에 있어야 도끼나 톱, 혹은 병충해의 재난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그 기량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도량에 대한 취사선택도 하나의 인연법입니다. 청정하고 조용한 곳이라고 해서 다 도량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곳이 바람직한 도량입니다. 저처럼 성격이 괄괄한 사람들은 야산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맥이 빠집니다. 골짜기가 깊고, 봉우리가 솟고, 개울물이 기운차게 흐르는 곳에서 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반면에 마음이 비단결 같은 사람들은 그런 곳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잔잔한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곳이 좋은 도량이고, 어떤 곳이 좋지 않은 도량인가? 이것은 상대적인것입니다. 자기 기질과 환경이 맞아야 합니다. 기도할 절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 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자연환경 못지않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자질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도량은 단순한 공간이 아닙니다. 살아 있고 생동하는 환경이어야 합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도량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똑같은 집이지만 어진 사람이 살면 그 집에 빛이 납니다.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그 공간에서 어떤 사람이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량을 먼 데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몸담아 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마음 닦기에 가장 알맞은 인연터입니다. 그 도량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일지라도 우리 집이 바로 내가 마음 닦을 수 있는 도량입니다. 내가 24시간 그곳에서 살면서 온갖 고통과 기쁨, 슬픔과 여러 가지 갈등을 겪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 내기 위해 그곳에서 의지적인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그곳이 도량입니다. 어디 산 좋고 물 좋은 그런 명당자리가 도량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가족과 함께 몸담아 살고 있는 바로 내 집이 내 마음 닦을 수 있는 도량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문제는 그 자리에서 진정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습니다. 무엇에 한눈팔지 않고 늘 깨어 있다면 그가 곧 그 도량의 주인입니다.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도반을 잘 만나야 한다. 이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려면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 옳은 말입니다. 8백 년 전,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를 했던 지눌보조 국사가 초발심자에게 당부하는 글을 썼습니다. 맨 처음 절에 들어가면 배우는<계초심학입문>이 그것입니다. 불교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처음으로 발심한 사람들이 마음 써야 할 일이 적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지침이 이것입니다.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라." 이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할 말도 많을 텐데, 출가 집단생활을 시작할 때 왜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라.'는 말부터 당부하겠습니까? 그만큼 함께 수행하는 도반의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도반이 지혜로우면 함께 지혜를 얻고, 도반이 어리석으면 더불어 어리석어집니다.
      <법구경>에도 이런 법문이 나옵니다. "차라리 혼자서 갈 일이지,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말라." 이것은 우리가 여행을 해 보면 절실하게 느낍니다. 인생의 행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혹은 어디에서든 차라리 혼자서 갈 것이지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출가 수행자의 길은 홀로 가는 길입니다. 자기 자신이 지닌문제는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존재와 생사의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가의 세계에서는 홀로 있을 때가 가장 넉넉한 뜰입니다. 부처님은<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좋은 친구란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함께 진리를 논하고 진리의 길을 걸을 도반을 만나기란 드문 일입니다. 또 다른 경전<상응부경전>은 다음의 일화를 전합니다. 하루는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이와 같이 묻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니, 우리에게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도반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 성스러운길의 절반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요?" 부처님이 벗의 소중함에 대해 자주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아난다는 자신도 그것을 이해한 듯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도반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이다." 부처님은 자주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나를 좋은 친구로 삼았기 때문에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병들어야 할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번뇌와 슬픔을 지닌 몸이면서도 번뇌와 슬픔으로부터자유로울 수 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테크닉이 아닙니다. 기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기교가 아니라 예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삶이 하나의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훈련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성숙한다는 내용인데, 이 책에 보면 나쁜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쁜 친구란 악의가 있고 파괴적인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첫째, 나쁜 친구란 일상적인 생활 태도가 음울하고 불쾌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활발해야 합니다. 음울하고 불쾌한 사람은 가까이 하면 나에게도 음울하고 불쾌한 기운이 묻어옵니다. 둘째, 육신은 살아 있으면서도 정신은 죽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탐구하는 노력이끝나면 정신을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졸업한 후로 책 한 권 안 읽는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셋째, 생각과 대화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탐구하는 노력이 없기 때문에 생각이나 대화가 시시한 것입니다. 넷째, 뜻을 담아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끝도 없이 지껄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듣는 사람의 인내심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다 익지도 않은 말을 마구 쏟아 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는 결코 좋은 친구가 아닙니다. 다섯째, 자신의 견해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의견에 휩쓸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지혜에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남의 주장에 휘둘리는 사람들이야말로
      나쁜 친구라고 에리히 프롬은 지적합니다. 내 주변에서 나쁜 친구를 가려내기 전에 나 자신이 과연 남에게 좋은 친구 역할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허물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그런 바탕이 준비되어 있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경전에서는 좋은 친구를 선우善友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선지식이라고도 합니다.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아니라 착한 벗을 선지식이라고 부릅니다. 선우, 나를 속속들이 잘 알고, 나를 받아 주고, 세상에선 다 내치더라도 나를 이해해 주는 마음의 벗입니다. 좋은 친구라는 것은 나를 속속들이 알아서 받아 주고 이해해 주는 그런 마음의 벗입니다. 또 나에게 보리심과 자비심을 발하게 하고 그때그때 깨우침을 주는 사람, 그가 좋은 벗입니다. 우리가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허물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좋은친구를 바로 가까이 두고도 먼 데서 찾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만나면서도 그 안에서 좋은 친구를 찾아야 되는데 먼 데서 찾는 것입니다. 너무 일상적인 접촉이 심하다 보니까, 다른 때 같으면 금방 나한테 들어올 좋은 친구인데, 너무 자주 만나다 보니까 범속해져서 그 친구가 지닌 좋은 요소, 좋은 향기를 내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 자신이 좋은 친구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 스스로가 좋은 친굿감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친구란 내 모자람을 채워 주는 존재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부족합니다. 그것을 내 친구가 채워 줍니다. 좋은 부부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단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상호 간에 보완해 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없습니다. 내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좋은 친구는 우리의 생에서 가장 귀중한 자산입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친구를 가졌다면 이 인생 자체가 든든해집니다. 스승과 도량과 도반을 아직도 찾지 못한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한 존재를 만나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안에 비춰진 스승과 도량과 친구를 보물처럼 간직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이 험난한 세상 살기가 조금도 두렵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ㅡ 법정 스님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