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개의 작은 화분을 곁에 두고 눈 속에서 지내고 있다. 초겨울 꽃시장에서 천 원씩을 주고 데리고 온 살아 있는 생물이다. 석창포 분에는 조그만 괴석을 곁들여 수반에 두어야 어울린다. 자금우는 차나무 잎처럼 생긴 그 이파리와 줄기에 매달린 빨간 열매가 아주 잘 어울린다. 이 두개의 화분이 없다면 겨울철 산방은 춥고 메말랐을 것이다. 밝은 창문 아래 두고 이따금 두런두런 말을 건네고 눈길을 마주하다 보면 우리는 남이 아닌 한 식구가 된다. 이 애들이 내 겨울을 향기롭게 받쳐주고 있다.
며칠 전 받은 뒤늦은 편지에 스님은 요즘 행복하냐고 불쑥 물어온 사연이 있었다. 이 물음을 받고 나는 새삼스레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기준도 행복 여하에 달린 거라고 생각된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일을 생각한다. 이것이 행복의 기초 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한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예쁜 찻잔을 골라주고, 밑반찬을 만들어주고, 손녀를 안아주는 일에서 그날의 행복을 누린다.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행복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다. 어떤 어머니는 애들 아버지가 퇴직을 하면 고향에 돌아가 된장을 맛있게 담아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다. 벌써부터 '솔바람 맑은 물ㅇㅇ된장'이란 이름도 지어 놓았다.
전해 듣는 마음도 싱그러워진다.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해진다. 현대인들은 행복의 기준을 흔히 남보다 많고 큰 것을 차지하고 누리는 데 두려고 한다. 수십 억짜리 무슨무슨 회원권을 지녀야 성에 차 한다. 물론 행복은 주관적인 가치이므로 한 마디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것은 아닐 것이다.
적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모자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할 줄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가르침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13세기 독일의 뛰어난 신학자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들과 정을 나누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들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석창포와 자금우 화분을 햇볕을 따라 옮겨주고 물뿌리개로 물을 뿜어주면서 그 잎과 열매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앉아 돌솥에서 찻물이 끓어오르는 '솔바람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을 때도 내 가슴은 따뜻해진다.
한밤중 이따금 기침을 하면서 깨어난다. 창문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었 을 때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흰 것을 보면 눈 위에 토끼나 고라니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볼 때도 내 가슴은 따뜻해진다.
한 해가 저물 무렵 편지 꾸러미를 풀어 챙기다가 뜻밖에 이제는 고인이 된 친지의 편지를 발견하고 다시는 더 만날 수 없는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를 두고 가슴 한쪽에는 애틋한 흐름이 있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살아 있을 때 이웃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자리를 잃지 않고 사람된 도리를 지켜갈 수 있다.
영국 속담에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옳은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니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비슷한 여건 속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자기 처지에 고마워하고 만족하면서 어떤 사람은 불평과 불만으로 어둡고 거칠게 사는 사림이 있다.
스스로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더 물을 것도 없이 그렇다면 내가 내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ㅡ 법정 스님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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