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어디 가면 너를 볼 수 있니

문성식 2022. 8. 13. 09:15


 
      어디 가면 너를 볼 수 있니 정민아! 어디 가면 너를 볼 수 있니. 이 세상을 아주 떠난 너를 어디 가면 볼 수 있니. 너를 보내야 하던 날 할아버지는 갈 도리가 없어서 마음으로만 "잘 가거라, 정민아. 하늘 나라로!" 하며 작은 꽃다발 하나를 너의 영전에 보냈다. 그 날 저녁 늦게 슬픔에 젖어 있는 네 엄마와 오빠, 동생들을 위로할 도리가 없지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장례는 어떻게 잘 치렀느냐 했더니 엄마는 너를 화장하였다고 하더구나. 나는 그래도 유골만은 거두어 집으로 가져왔겠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엄마는 "뿌렸어요." 하더구나. "뿌리다니, 그럼 정민이는 재도 없단 말이냐?" 네 엄마는 울기만 하고 답을 못하더구나. "어디에 뿌렸니?" "바다가 보이는 산에 뿌렸어요." 하며 엄마는 다시 울더라. 바다가 보이는 산에?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바다가 보이는 산에 너를 바람에 휠휠 날려 보냈다는구나. 정민아, 갈매기처럼 날아갔느냐! 흰 구름처럼 날아갔느냐! 아니면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에 다시 부서졌느냐!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더구나. 네 엄마는 분명 너를 그렇게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민아! 나는 너를 어디서 볼 수 있겠느냐! 하긴 이 세상에서도 나는 너를 제대로 본 것은 네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 부활 다음날이었다. 그 때 벌써 너는 소생할 가망 없이 병세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하더구나. 하지만 "이 아이만은 단념할 수 없어요." 하며 너의 발병을 알리던 전화에서 내게 한 엄마의 간절한 애원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너의 병 치유를 위해 기도해 왔고 "희망이 없는 것에 희망"을 걸어 보았다. 네 앞에 네 사촌 오빠인 정권이가 같은 병으로 먼저 갔기에 나는 너의 병, 그 몹쓸 백혈병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민이 대신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하고 기도도 바쳤다.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고 너는 앞날이 창창한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가 아니냐. 마산 삼성 병원에 너를 병 문안한 그 날도 네 손을 잡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를 대신 데려가 주시고 이 아이를 살려 주소서." 하고. 그러나 할아버지의 기도도, 믿음도 약한 탓인지 하느님은 너를 기어이 데려가셨구나. 그러나 정민아, 나는 믿는다. 네가 마지막 시간에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겼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묵시 21, 4) 그 생명의 나라, 빛과 평화의 나라,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로 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정민아! 너는 참으로 마음으로 가난한 소녀였다. 그러기에 분명히 하늘 나라를 차지하였을 것이다(마태 5, 3 참조). 그래도 아직도 이 땅에 남은 우리들-엄마와 네 형제들은 물론이요, 이 할아버지도 너를 잃은 슬픔을 떨쳐 버릴 수 없구나. 한줌의 재가 된 너를 그나마 바람에 날려 버린 것이 못내 아쉽구나. 정민아! 무덤도 묘비도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너를 어디 가면 볼 수 있겠느냐. = 김수환 추기경님(1997.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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