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전북 완주군***한국 천주교 순교자 聖地 순례ㅡ완주 이서면ㅡ초남이 순교자 성지

문성식 2022. 7. 9. 08:50

한국 천주교 聖地 순교자 순례ㅡ완주 이서면 남계리ㅡ초남이 순교자 성지




▲초남이성지 입구 마을


▲초남이 성지 위치도


▲초남이성지 입구 마을


▲초남이성지 입구 마을


▲초남이성지 입구 마을


▲초남이 성지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 터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전주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전주 쪽으로 가다 보면 '동정 부부 생가 터'라는 안내 돌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5km 정도를 더 가면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사적지가 나온다.


지금의 형정 구역으로는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 마을이다. 1754년에 류 아우구스티노가 탄생한 곳이자 동정 부부로 유명한 류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가 살다가 체포된 곳이다.


현재 이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동산동 본당에서는 1987년에 그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한 뒤 축복식을 했다. 류항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전주 일대에 널리 신앙을 전함으로써 '호남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마련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교회일을 열심히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로 이종 사촌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다음해에는 감영에 자수하여 신앙을 벌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류항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한국 천주교회의 반석이 무너지면서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먼저 류항검의 아우인 류관검과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이 체포되었고, 이어 류항검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가산은 적몰되고 초남리의 집에는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순교로 전주 남문 밖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앞서 류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와 동생 문철(요한), 사촌 동생 중성(마태오)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 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동안 류중성(마태오)은 매우 열렬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순이(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4면). 훗날 다블뤼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누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였다.


▲성지 주차장


▲성지 주차장



▲초남이 성지


1754년 전북 완주군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항검은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대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은 이순이(루갈다)와 평생 동정 부부로 살아간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들 동정 부부는 1797년 혼배 후 1801년 치명할때까지 4년간 이곳에서 동정 생활을 했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간, 권상연과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리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 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과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이승훈, 정약전과 인척간이었으므로 이들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 일신에게서 교리를 듣는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고향에서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홍낙민, 최창현, 이존창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된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초남리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 신부는 그의 집에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 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 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는다.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동생 유관검 등 그의 모든 일가 친척들이 거의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 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일꾼들과 신자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놓고 김제군 제남리에 가매장했는데 지금은 전주 치명자산에 모셔져 있다.


▲조선천주교 최초교리당


▲주문모 신부 첫 미사봉헌처


▲주문모 신부 첫 미사 봉헌 기념석


▲1784년  호남 천주교 발상지


▲피가저택지 경당 


▲유항검 피가저택지 경당


▲유항검 피가저택지


▲조선천주교 사도 유항검 기념비


▲생가터 야외경당


▲생가터 야외경당


▲생가터 야외경당


▲피가저택지


▲피가저택지 야외 제대


▲피가저택지 야외 제대


▲피가저택지 야외 제대


▲피가저택지 야외 제대


▲초남이 성지 


▲초남이 성지


▲피가저택 설명비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 편지


어머님 전상서 "문안 아뢰옵나이다. 여러 가지 근심되는 중에 생각하오니, 어머님 슬하를 떠나 온지 지금 4년에 허다한 말씀 아뢰고 싶사오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사옵고, 다만 몇 줄 글자만 아뢰옵나이다."(중략) "어머님 소녀가 시댁에 들어오는 날 평생에 쌓였던 일만 근심이 완연히 풀린 것은 일찍이 마음에 맺고 결정하였던 원을 한 평생에 어떻게 보존하여 지낼까 염려된바 말 할 수 없어서 근심 걱정이 심중에 구비 구비 맺혀 쌓였더니, 우리 내외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을 형제같이 살매, 그 사이에 혹독한 유혹이 몇 번 있어 대개 열 번이나 거의 무너질뻔 하였사오나, 공경하올 성혈 공로로 마귀의 계교를 물리쳤나이다.(중략) “이런 말씀을 하옵는 것은 어머님께서 혹시나 이 일로 걱정 하실까 함이오니, 이 글월을 받으실 때 소녀의 얼굴을 대하심 같이 받으시옵소서. 다시 또 말씀 드리오니 아무쪼록 근심 마옵소서. 이 세상은 헛되고 거짓됨이 옳소이다. 할 말씀 많사오나 더 쓸 수 없사와 그치옵니다." 유중철이 순교한 뒤 그의 옷 속에서는 자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동정부부 생가 


▲동정부부 생가 


▲동정부부 순교문


▲동정부부 생가


▲성 요셉 성가정의 집


▲성 요셉 성가정의 집


▲구계숙 작 , 이순이 누갈다와 유중철 요한


▲조창원 작, 유중철과 이순이의 동정부부, 65 x 53cm, 2008년


▲초남이 성지 역사 그림


▲동정부부 요한루갈다 


▲최초 신자마을 (공소)


▲최초의 교리당 유항검


▲여성교리 공부


▲명례방 최초 신앙집회 


▲유항검 형제 체포


▲순교자 사형집행


◆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의 인척 권일신이었다.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1786년 봄에 가성직제도하에서 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 순교자 김천애 안드레아 (1760∼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항검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고 그 뒤를 이어 김천애와 유항검의 맏아들인 유중철(요한)이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혹은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순교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1756∼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 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안드레아)와 최여겸(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에 따라 그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수녀원


▲사제관


▲유항검 교리당


▲교리당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