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충남 당진군***한국 천주교 순교 聖地 순례ㅡ신평면 순교자 묘.신평성당

문성식 2022. 7. 1. 08:46

천주교 순교聖地ㅡ당진군 신평면 순교자 묘.신평성당




▲신평 순교 聖地 


신평 성당 구내에는 두 분의 순교자 묘가 있었다. 

병인박해 2년 후 무진년에 원머리에 살던 순교자 박 마르코와 그의 사촌 박 마티아의 묘다.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후 원머리에 안장되어 있다가 

1989년 4월에 신평 성당 내로 이장되어 모셔져 있었다.


신평면 지역의 복음 전래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가 충청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1883년에 이미 신평면 한정리(寒井里, 또는 원머리)와 매산리(쇠터 또는 새터)에 공소가 설립되어 있었고, 1886년경 한정리 공소와 매산리 공소의 신자수는 각각 117명과 119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므로 신평면의 복음 전래는 1883년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이들 두 공소는 1890년 양촌(陽村) 본당 설립과 함께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899년에 합덕(合德, 현 구합덕)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이후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금천(金川) 공소·음셈리(현 신평면 매산리) 공소·신당리(新堂里) 공소·거산리(巨山里) 공소·초대리(草垈里) 공소·운정리(雲井里) 공소로 각각 설립되어 이 공소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신앙 생활이 전개되었다.


1960년 11월 신합덕 본당이 설립되자 이곳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1975년에 이 8개 공소가 통합되어 ‘신평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이종대 신부는 원머리 공소에서 경작하던 간척지 7,636평을 매각하여 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한 뒤 현 성당 부지에공사에 착수, 1976년 3월 성당(89평)과 사제관(32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4대 주임 윤여홍 신부는 원머리 공소 출신으로 무진년(1868년)에 순교하여 원머리에 안장되어 있던 박선진(마르코)과 박 마티아의 유해를 1989년 4월에 성당 내로 이장하였는데, 이는 대전교구 성지 보존·개발 작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1999년 9월 기공식을 거행한 뒤 이듬해 11월 2층 성당(710평)을 신축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2000년 9월에는 성당 내에 이장했던 두 순교자의 현양비를 봉헌하였다. 이처럼 신평 본당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느끼며 순교 신심을 본받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평성지 위치도


▲현양비


순교자 박선진(말구)과 박 마지아는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종형제이다. 원머리에는 박해시대인 185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박 말구의 부친은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으며,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외교인들의 방해로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1868(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 감옥에 갇혔으며 옥에 갇힌지 15일 후 순교하였는데 그 때 박 말구는 33세였고, 박 마지아는 50세였다.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그 시신을 찾아 원머리 박씨 집안의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내로 이장하였으며 2000년 새 성전을 신축하면서 묘역을 다시 정비하였다.


박 말구가 수원으로 잡혀갈 때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면서 “천주님의 뜻대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을 구하는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하였다.


또한 박 마지아가 모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할 뜻을 비치자 “주님을 배반하고 영원한 지옥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쳐 함께 순교하니 그 믿음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될 것이기에 여기 현양비를 세워 그 높은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순교자 묘


▲순교자 묘


▲순교자 묘


▲순교자 묘


■ 순교자 박 마르코 박 마티아 유해 봉송 및 이장


2009년 11월 3일(화) 오전 10시 30분 신평 성당(주임 정필국 신부)에서는 한정리(원머리)에서 1989년 4월 신평 성당 경내로 이장되어 성당에 모셔져 있던 2기의 순교자 묘를 다시 한정리(원머리) 묘역으로 이장하는 ‘순교자 박 마르코 박 마티아 유해 봉송 및 이장식’이 거행되었다. 1989년 4월 교구 성지 보존ㆍ개발 작업의 하나로 두 순교자 유해를 신평 성당 경내로 이장한 지 20년 만으로, 재이장은 한정리(원머리) 묘역을 성지로 개발하기 위해서다.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에는 1850년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그곳에서 출생한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 와 박태진 마티아는 4촌 형제간이었다. 박 마르코는 모친의 뜻에 따라 착실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8년(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티아와 함께 15일후 교살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날 유해 봉송 및 이장은 신평 성당 묘역에서 두 순교자 유해를 출관한 뒤 가마를 이용해 한정리(원머리) 옛 묘역까지 두 순교자 유해를 봉송하고 본래 묘역에 안장했다. 순교자 후손 박종훈(대전성모병원 원목차장) 신부는 직접 유해 가마를 메고 봉송에 참여했다.


▲순교자 재 이장 미사


▲순교자 재 이장 미사


▲순교자 재 이장


▲순교자 재 이장


▲순교자 유해


▲순교자 유해


▲순교자 유해 봉송 가마


▲순교자 유해 봉송 가마 행렬


▲순교자 유해 봉송 가마 행렬


▲원머리 구 묘지 재 이장 미사


▲원머리 구 묘지 재 이장 미사


▲원머리 순교자 묘역에 안장되는 순교자 유해


신평 성당 내에 있던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순교자의 유해를 본래 묻혔던 원머리 묘역에 재이장하여 안치하는 모습이다. 1989년부터 머물던 신평 성당을 떠나 본래의 자리로 재이장하기 위해 3km 정도 떨어진 원머리(한정리)로 가마를 이용해 봉송된 순교자들의 유해 이장식이 2009년 11월 3일 대전교구 사제단과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순교자 재 이장 전 원머리 순교자 묘역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미티아


▲원머리(현 한정리) 구묘지, 1929년8월 김창목 촬영


▲원머리(현 한정리) 재 이장 전 구묘지


▲원머리(현 한정리) 구묘지


대전교구 원머리 성지로 재이장되기 전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순교자 묘역 모습이다. 두 분은 1868년 병인박해의 광풍 속에서 수원 감옥에서 순교하신 후 고향 원머리의 박씨 집안 땅에 안장되었다. 그 후 두 분의 유해는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셔졌고 현양비를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위의 사진은 신평 성당 내로 유해를 모신 뒤 2009년 11월 3일 다시 본래 자리로 이장하기 전까지의 모습이다.


▲신평성당 성지


▲신평성당


▲신평성당


▲신평성당


▲신평성당 정문


▲신평성당 출입문 위 부조


▲신평성당 내부


▲신평성당 내부


▲신평성당 내부


▲성모상


▲성모 상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