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전북 익산시***한국 천주교 聖地 순례ㅡ익산 망성면 나바위 성지

문성식 2022. 7. 23. 08:23

한국 천주교 聖地 순례ㅡ익산 망성면 나바위 성지




▲나바위 성당 성지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전북 익산시 망성면(望城面) 화산리(華山里) 나바위[羅岩] 부락에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나바위에 있는 동학농민운동 때 망해버린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하고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한국 초기 본당의 하나로서 당시의 한국 풍속에 따라 남녀의 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각기 달랐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나바위는 옛날 선착장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어 한국에 첫발을 디딘 곳이다. 김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발끝을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킬로미터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에 순교했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 떼였고 다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맞이했으나 그나마 1839년에 모두 잃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또다시 한국 교회는 한 분의 사제도 없는 암흑기를 지내야 했던 것이다. 목자를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양 떼들에게 세 분 성직자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김 신부 자신도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던 고국에서 첫 방인 사제로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 만장한 것이었다. 1836년 12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 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는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 김가항 성당에서 8월 17일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는다.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길을 갔던 조선인 선원들과 두 분 성직자를 모신 김 신부는 첫 방인 신부로 나바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비록 고국에서의 사목 활동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총명함과 굳건한 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익산 나바위 성지 위치도


▲나바위 성지 입구


▲나바위 성지 입구


▲입구 순교자의 묘 성 피에타상


▲나바위 성지 사무실


▲나바위 성지 안내도


▲화산 천주교회(나바위 성당)


'나바위'라는 이름은 이 지역 익산에 있는 화산에서 연관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은 1897년에 설립됐으나 성당 건물은 1906년에 완공됐다. 1916년에는 목조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증축했다.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성당은 특히 회랑으로 인하여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지방 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돼 있다. 1997년에 1백주년을 맞는 나바위 성당은 일제 시대, 6·25를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 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입구 피정의 집 바다의 별


▲피정의 집 앞에 세워진 요셉 장약실 신부 공훈기념비


▲나바위 성당


▲예수 성심상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 뒷편


▲나바위 성당 출입문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나바위 성당 내부 한지 유리화


▲한지 유리화


▲나바위 성당 내부 한지 유리화


▲나바위 성당 내부 한지 유리화


▲사제관


▲성당 뒷편 피정의 집


▲피정의 집


▲피정의 집 김대건 신부상


▲평화의 모후상


▲평화의 모후상 /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소세 신부 묘


소세덕 신부 묘


소세덕 신부 묘


십자가 길 정상의 망금정


◆순교비와 망금정


화산 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여 나바위 성당이 설립된 후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가 해마다 5, 6월이면 연례 피정을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가졌다.


개인 피정 장소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인 이곳의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에 감탄한 베로모렐 신부는 피정을 하시는 주교님을 위해 1915년 정자를 지어 드렸다. 이 정자를 드망즈 주교는 망금정이라 이름 붙였다. 금강을 바라보며 세분 성직자의 아름다운 영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장소이다.


망금정옆 김대건 신부 순교비


김대건 신부는 1836년 12월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을 떠나 1845년 8월 17일 상해 인근의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서 함께 출국했던 교우 11명과 함께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에 주교가 됨)를 모시고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망망대해를 표류하며 갖은 고생 끝에 제주도를 거쳐 42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밤 이곳 황산포구 나바위 기슭에 상륙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 순교비